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벗 Nov 10. 2020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기

어릴 때 무서워하던 괴담 가운데 그림자 없는 귀신 이야기가 있었다. 길을 가다가 아리따운 여인을 만났는데 나중에 뒤돌아서 다시 보니 그림자가 없었다나. 정확한 줄거리는 잊어버렸다. 하지만 고작 그림자가 없는 걸 보고 방금 만난 '사람'이 귀신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져서 비명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우리 본능은 그림자가 없는 것이 그만큼 이상하다는 걸 알기에 이 이야기를 듣고 오싹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그림자는 융 심리학, 플라톤 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관심을 가지는 주제이다. 사람 마음속에 도사린 그림자이든 실존에 대한 그림자이든 그림자는 자신이 실체는 아니지만 실체에 대비하여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그림자와 어떻게 공존하느냐 하는 것이리라. 어떤 이들은 그림자의 존재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지만 나는 늘 무언가 불편했다. 들여다 보아도 잘 보이지 않고, 아무리 고민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항상 불편한 무언가. 내 삶에 두터운 그림자가 드리운 요즘, 꽤 오랫동안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그림자라는 걸 문득문득 다시 돌아보게 된다.


아들은 그림자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내면과 세상의 어두운 면에 대해 늘 불편해했다. 나는 엄마로서 어린 나이에 이런 인식한다는 사실이 늘 걱정스러웠다. 특히 어린 시절,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어둠을 생각하다가 수렁처럼 끌려들어 가고, 때로는 헤어 나오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라서 아들도 그러면 어쩌지 하고 불현듯 불안이 엄습하기도 했다. 아들이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 때로는 대수롭지 않은 척 넘기기도 했다.

"밝고 긍정적인 부분을 보고 살아야지 허구한 날 그런 생각만 하고 어떻게 사니?"

그림자의 존재를 부정하다시피 하는 긍정의 심리학 방식의 접근이라고 할까? 하지만 아들에게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진지한 고민은 몇 년 후에 하라고 얼르기도 했다.

"세상에는 그런 모순이 많아. 그게 세상이고 사람이야. 대학 가면 네가 무슨 전공을 하든지 심리학은 꼭 공부해 봐. 지금 고민하는 문제를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연구해 놓았으니까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좀 될 거야."

그 몇 년이 결코 오지 못하는 시간이 될 줄은 몰랐으니까......

아들이 이런 고민을 너무 깊이 한다는 사실에 압도되었을 무렵, 회피와 같은 대답을 해주었다.

"세상은 그냥 게임 같은 거야. 누가 만들었건, 왜 만들었건, 그렇게 만든 게 그르거나 말거나, 게임을 즐겁게 잘하면 그만 아니겠어. 인생은 누가 인생을 잘 아는가 게임이 아니라 누가 잘 사는가 게임이야."

성서의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내놓은 결론과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 평생을 살아봐도 세상의 모순을 이해할 수 없으니 그냥 즐기며 살면 그만이라는 것. 비슷한 맥락에서 아들이 한때 에피쿠로스 학파에 심취했던 적도 있었다. 10학년 영어 시간 초반에 문학 작품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룬 주제였는데 독서와 원예를 가장 중시하는 에피쿠로스의 이념과 아들의 취미가 잘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창 이성이 발달하는 나이의 아이가 신조로 삼을 수 있는 가치체계는 아니었다.


그다음 시작된 햄릿 단원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의 출발이었다. 수업시간에 햄릿을 주제로 한 작문 시험에서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백지를 제출했다. 집에서는 햄릿을 읽고 또 읽었다. 햄릿을 손에서 놓지 못하면서 한 줄도 쓸 수 없어 과목 낙제였다. 내가 한 일은 영어 과외 선생님을 교체한 거였다. 새로 구한 선생님은 실력 있고 좋은 분이었고 재수강했을 때는 좋은 점수를 받았으니까 그때는 과외 선생님 교체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는데. 각색된 햄릿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을 뿐 햄릿이라는 작품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아들이 무엇에 압도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들이 세상을 등진 뒤 방을 정리하다가 작문 몇 점을 철해 놓은 파일을 발견했다. 정확한 구절은 인용할 수 없지만, 삼촌을 살해하기 전에 햄릿이 죽음과 삶에 대해 했던 고민이 아들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는 것을 그 글에서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물론 햄릿이 불행의 단일 또는 직접적 원인은 아니며, 매우 복합적인 원인으로 일어난 일이다. 단지 아들이 삶과 죽음을 저울질하며 내면의 어둠에 압도되고 있을 때, 나는 고작 영어 과외 선생님 바꿔주고, 그냥 잘 살면 된다는 이야기나 했다는 사실은 뼈아픈 후회로 남았다.


아이가 한 줄도 쓰지 못한 건 그림자였고, 문제의 실체는 따로 있었는데 난 쉬운 길로 도피한 셈이다. 더 이상 도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림자를 보고 도망가면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니까. 그림자를 부정하지도 않으려고 한다. 내 삶이 컴컴한 그림자 속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단, 그림자 뒤에는 언제나 빛이 있으므로 빛을 찾아보려고 한다. <My Son, My Son>에서 아들을 잃은 저자에게 경륜이 많은 심리학자가 "아들이 남기고 간 선물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냥은 찾을 수 없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그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라는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이 대목을 읽을 때 나는 아들을 잃고 선물을 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나 같으면 정신 나간 학자라고 욕을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2주기를 지내면서 딸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고, 딸과 함께 아들이 두고 간 선물을 찾아보기로 했다. 벌써 한두 가지는 찾은 느낌이다. 그림자를 보고 도망가지 않기로 한 것도 아들의 선물이지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1980년 잡종견 모녀 실종 사건 (I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