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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Nov 25. 2020

사촌 언니를 보낸 뒤 여러 가지 생각

사촌 언니가 며칠 전 돌아가셨다. 간에 관련된 질병으로 1년 넘게 고생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끝으로 본 게 3년 전이니까 투병할 때 모습은 보지 못했다. 작년에 한국에 나갔어도 친구와 직계 가족만 만났고 친척을 만나기는 계면쩍어서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한국에 살 때는 그래도 1년에 한두 번 보았고, 어릴 때부터 친적 중에서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어서 언니의 부고를 듣고 왈칵했다.


언니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아담한 체구에 예쁘장하고 똑똑하고 당찬 사람이었다. 언니의 엄마는 나의 고모인데 고모는 나의 아빠처럼 물러 터진 성격이어서 야무진 언니의 핀잔을 먹곤 했다. 뭐든 똑 부러지고 야무진 언니를 엄마는 종종 나의 비교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나는 주로 흐리멍덩한 편이어서 엄마는 나를 보면 속이 터지는 일이 많았다. 내가 얼굴은 자매보다 사촌 언니와 더 비슷한데 성격은 왜 그렇게 딱 부러지고 야무지지 못한 지 답답해했다.


언니에 대한 여러 가지 기억이 올라왔다. 언니가 중학교 때 까만 교복에 양갈래로 머리를 땋고 피아노 책을 옆구리에 끼고 우리 집에 놀러 왔던 기억, 고모 댁에서 밥을 먹을 때는 함께 음식을 준비한 언니가 우리에게 음식을 나르라고 시키던 기억도 났다. 언니랑은 얘기를 많이 했다. 종교 이야기도 하고, 엄마는 왜 매사에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지, 장래 진로 얘기도 했다. 내가 입시 후 사회사업학과에 붙었다고 했을 때 언니는 왜 돈도 안 되는 전공을 택했냐고 했다. 나는 뾰로통해서 요즘은 유망하다고, 받아쳤다. 사실 사회사업학과가 유망했던 적은 없지만 삐쳐서 한 말이었다. 언니는, 꼭 비인기학과에 진학하는 애들이 그런 말 하더라, 하고 지지 않았다. 언니 아래로 동생 셋이 있는데 해외에 사는 조카 사진을 붙여 놓고 얘 인형처럼 너무너무 예쁘지 않냐면서 자랑하던 기억도 난다.


언제나 자기 의견 뚜렷하고 똑똑했던 언니는 하고 싶은 일이 나오면 직진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일본식 종이 인형 공예에 빠졌을 때, 언니 방은 인형의 집이었고, 미술관에 놓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은 예쁜 인형을 만들었다. 비누 공예도 사람의 손길인가 싶게 예쁘게 만들어서 온 집안에 향긋한 비누 향이 풍기기도 했다. 홍대 앞에 스킨케어 샵을 낸 적도 있어서 결혼 전에 신랑과 함께 가서 마사지를 받기도 했다. 그때 언니는 손끝에 살이 좀 더 있었는데 마사지를 해줄 때 느낌이 더 좋았을 거라면서 손끝 마디에 살이 통통하게 오르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스킨케어 샵을 꽤 오랫동안 운영했는데 몸이 약한 언니에게 무리였다. 어깨 결리고 피곤하다면서 그 후로 계속 아팠고, 그것은 지압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다. 늘 지압 책을 보고 공부하고, 자기한테 실험하고, 효과가 좋다면서 나한테도 배워보라고 했다.


그런 기억을 남기고 언니가 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모임이 꺼려지는 분위기에서 가까운 가족만 모여서 조촐하게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는 엄마와 아빠만 대표로 다녀오셨다.


엄마는 다녀와서 딸들에게 장례식 후기를 카톡으로 보냈다. 팔순 고모는 놀랍도록 매우 씩씩했다는 것, 형제들은 우리가 부의금을 보내주어 고맙다고 했으며 올케들이 수고하더라는 것 정도. 그리고 늙은이의 말을 새겨들으라면서 연이어 올린 톡은 내 마음을 무척 불편하게 했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도 슬퍼하지 않느냐면서 우리 보고 베풀고 똑바로 살으라는 훈계였다.


엄마, 그건 아니지. 팔순 고모가 예순 딸 앞세우고 멀쩡해 보여도 그게 어떻게 멀쩡하겠어?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밤이 오면 흐느껴 울 거야. 형제들은 어떻게 그리워하지 않으면서 살겠어? 무척 그리울 거야. 언니가 인정머리 없이 살아서 모두 슬퍼하지 않는 게 아니야. 나는 무척 슬픈 걸. 형제들도 무척 슬플 거야. 친구들도 알면 무척 슬플 거야. 나는 아들 장례식 때 사람들 앞에서 울지 않았어. 너무 놀라도 눈물이 안 나오는 거고, 전날 너무 많이 울어도 눈물이 안 나오는 거고. 엄마는 하고 싶은 말 참고 사는 사람은 위선자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내가 위선자 되더라도 내 말에 상처 받는 사람 있을 것 같으면 그냥 말을 삼키는 게 낫다고 생각해.


모르겠다. 나는 엄마와 무척 다르고 아직도 엄마 말에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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