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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벗 Jan 17. 2021

정인이 사건은 차츰 잊혀가겠지만

한동안 소셜미디어를 덮었던 #정인아미안해 태그가 조금씩 잠잠해진다. 생후 7개월에 입양되어 양부모의 학대 끝에 16개월의 짧은 생을 마감한 정인이. 의사가 아이의 의학적 상태로 추측하건대 아이가 당한 학대는 말할 수 없이 잔인했다. 그 작은 어린 몸으로 숱한 매질과 모진 학대를 견뎌내다가 죽음으로 휴식을 얻었을 정인이. 이 가슴 아픈 사건은 내가 25년 전쯤인 사회생활 초년에 겪었던 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불러냈다.


그때 나는 한 비영리 기관에서 아동학대예방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부서에 있었다. 25년 전에 우리나라에 아동학대에 대한 개념이 있기나 했을까? 맨땅에 헤딩하는 일이었다. 우리 기관이 그런 일을 시작한다고 알려지면서 가정에서 일어난 학대로 죽음 문턱에 이른 아이가 있다는 신고가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SBS TV에 영훈이라는 가명으로 보도된 사건도 그중 하나였다.


한 번은 내가 사는 동네에서 제보가 들어왔다. 동네에서 이 집 저 집 떠돌아다니는 아이가 있는데 아이가 집에서 막 나올 때에는 온몸이 멍투성이였다는 제보였다. 수소문하여 아이의 가정 사정을 알게 되었다. 아이는 친모, 친모의 친구 A, 그리고 A의 자녀들과 함께 좁은 집(단칸방이라고 기억하는데 정확치 않다)에 살고 있었다. 부친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었다. 친모는 명문대 간호대를 졸업하고 그 대학 부속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었고, 아이는 시골에 있는 조부모에게 보내어 길렀다고 한다. 문제는 친모가 병원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하고 아이와 함께 살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아이가 열 살 정도 되었는데, 거의 10년 동안 따로 살던 모녀는 서로 적응하지 못했다. 엄마는 버릇이 엉망진창인 아이를 바로잡아야 했고, 아이는 그런 집에서 살 수 없었다. 아이는 엄마가 때릴 때마다 도망쳐서 자신을 재워주는 집에서 잤다. 엄마에게 발견되면 다시 집으로 잡혀 들어가 엄마에게 매를 맞았다.


우리 부서는 아이를 도울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고 자원을 찾아보았다. 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아이의 어머니가 동의하면 아이를 몇 년이고 보호해줄 수 있는 그룹홈을 찾아냈다. 그룹홈 운영하시는 분도 만나 뵈었는데 신뢰가 가는 분이었다. 그룹홈은 아늑하고 쾌적했고, 아이들은 착해 보였다. 그런 정보를 들고 아이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 어머니는 촉촉하지만 강렬한 눈빛으로 그 아이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못된 아이"라고 했다. 매는 아이의 몸을 상하게 하지만 영혼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자신의 훈육이 정당하며 이에 대해서 아무도 이러쿵저러쿵할 수 없음을 주장했다. 말하는 중간중간 입술을 앙다무는 모습에 나는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당시 이십 대 초중반이었던 내가 뭘 안 다고 그 어머니를 만나러 나갔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학교에서 배운 대로 상황이 힘든대도 아이를 키우려는 어머니가 대단하시다고 공감해주고, 우리가 알아본 바로는 아이를 몇 년이고 보호해줄 수 있는 그룹홈이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그룹홈은 한 교회의 후원으로 운영되어서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신앙 교육도 해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너무 힘드시면 이 그룹홈에서 당분간 아이를 맡기시면 좋겠다고 하고 지금은 그룹홈에 자리가 있지만 금방 차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연락을 달라고 부탁드렸다.


얼마 후 어머니에게 연락을 받았다. 아이를 그룹홈에 맡길 것이라고. 단, 아이를 데려가기 전에 본인에게 꼭 전화를 해야 한다고 했다. 뛸 듯이 기뻤다. 아이를 보호하고 있던 가정에 아이를 찾으러 갔다. 어머니의 지시대로 전화를 드렸으나 전화가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한두 번 전화하다가 그룹홈에 도착하여 전화를 드리기로 했다. 아이는 아주 밝고 붙임성이 좋았다. 아이가 빼빼 마르기는 했지만 가출한 지 오래되어서 온몸을 뒤덮은 멍은 노란색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그룹홈에 도착하자 아이는 들뜬 얼굴로 실내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아이는 조그만 메모지에 편지를 써서 그룹홈에 있는 책상마다 올려놓았다. 그리고 아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 어머니는 노발대발이었다. 분명히 아이를 데려가기 전에 전화를 하라고 했는데 전화를 주지 않고 그룹홈에 데려갔으므로 약속도 지키지 않는 이런 사람들한테 아이를 맡길 수 없다고 악을 썼다. 전화를 드렸다고 말했지만 그러면 얼마가 걸리든 연결이 될 때까지 기다렸어야 한다며 아이를 당장 데리고 오라고 했다. 당장 데리고 오지 않으면 당장 고소하겠다고 했다. 매 맞는 아이를 구하려다가 납치범으로 구속될 생각을 하니 나의 무능함에 억장이 무너졌다. 더 이상 우길 수 있는 법적 근거와 수단은 아무것도 없어 나는 아이를 데리고 그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나는 우리를 납치범이라며 소리소리 지르는 어머니 앞에서 아이와 함께 무릎을 꿇고 앉아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는데 아이를 데려간 것을 사과했다. 어머니는 계속 고소한다면서 다시는 아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했다. 아이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펄쩍펄쩍 뛰는 어머니 앞에 비쩍 마른 몸으로 온몸을 떨어대는 아이를 놔두고 돌아설 때 머리가 저릿저릿 어지러웠다.


다음 날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전에 봤던 머리를 맞아 얼굴이 까매진 학대 아동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머리를 맞으면 피가 아래로 흘러서 눈 주위가 까매진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었다. 영훈이 얼굴도 떠올랐다. 내가 간호해주러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살이 통통하게 올라서 구출 당시의 뼈만 앙상한 모습은 아니었으나 그 천진한 모습의 아이가 부모에게 맞아서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났다. 내가 오늘 두고 온 아이가 그렇게 맞아 죽으면 그건 내 잘못이 아닐까? 내가 일을 잘못 처리해서 그 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에 나는 며칠 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이십 년이 넘게 흘러서 그 일은 아주 가끔 떠오르는 일이 되었다. 내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나는 가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잔혹범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아이도 가정에서,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은 만큼 괴로웠던 것은 아닐지. 참 모순이다. 그런 부모를 가장 미워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이 그런 인간이 아닐까 자책하는 사람이 되었다니... 한편 정인이를 신고했지만 보호해주지 못한 선생님들도 나처럼 깊은 죄책감에 오래 허덕일 거라는 생각도 한다. 수없이 많은 아이들이 가정에서 감옥보다 숨 막히는 생활을 한다는 생각도 한다. 매질을 당하거나 성적인 괴롭힘을 당하거나 부모의 무관심이나 무자비한 말로나, 아니만 그 모든 학대를 당하거나. 내가 어느 면에서 가학적인 부모에 속했을까?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럴지도.


한편으로는 그때 진심으로 열심히 했던 그 일이 이제는 번듯한 신고 및 지원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에 뿌듯한 마음도 있다. 그래도 이 사건을 보면서 가정 내 숨어있는 학대를 모두 찾아낼 수 없다는 절망감도 든다. 정인이 사건이 잠잠해지겠지. 가정은 언제나처럼 철옹성 같겠지. 부모는 항상 당당하겠지. 그 안에서 죽음을 맞는 또 다른 아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또 얼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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