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방문을 열고 다시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하여 (<소년의 시간> 리뷰)
1. 믿었던 아이, 우리가 몰랐던 진실
어스름한 새벽의 정적을 깨고, 무장한 경찰들이 열세 살 소년 제이미의 집으로 들이닥친다. 잠결에 끌려 나온 소년은 아버지의 동석 하에 경찰서의 서늘한 공기를 마주한다. 수사관이 채혈을 위해 주사기를 꺼내 들자, 제이미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돌린다. 그 찰나의 통증조차 두려워하는 모습은 여전히 부모의 안온한 품이 절실한, 열세 살 아이의 얼굴일 뿐이다.
하지만 이 어린 소년은 불과 몇 시간 전, 같은 학교 여학생 케이트를 칼로 수차례 찔러 숨지게 한 살인 용의자다. 범행 장면이 선명히 기록된 CCTV 영상을 배스컴 경위가 눈앞에 들이밀기 전까지, 제이미는 자신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며 범행을 부인한다. 아들의 결백을 믿었던 아버지는 영상 속 잔혹한 진실을 목도한 순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주사바늘 하나에 몸을 떨던 유약함과, 사람을 죽이고도 태연히 결백을 말하던 뻔뻔함. 이 극단적인 두 얼굴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제이미의 범행 영상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저런 아이가 설마 사람을 죽였겠나.’ 싶었다. 수사 과정에 어떤 치명적인 착오가 있었을 거라고, 거듭 묻는 아버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그 눈동자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진실이 드러난 순간, 문득 교실에서 마주하던 학생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다. 교과서에 열심히 필기를 하거나, 창밖을 보며 멍하니 앉아 있거나, 친구들과 깔깔대며 재잘거리던 평범한 풍경들. 그 무해해 보이는 풍경 너머,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이들과 일상을 공유하는 교사로서, 나는 그들의 세계를 제대로 읽어내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당장 제이미와 비슷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내 아들은 어떠한가. 학교와 학원, 거리와 놀이터에서 아이는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무슨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나는 내 아이에 대해 얼마만큼 안다고 자부할 수 있나.
제이미의 아버지 에디는 유년 시절 가정폭력에 시달렸지만, 어두운 대물림을 끊기 위해 좋은 아빠가 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다. 가족을 위해 성실히 땀 흘리는 가장이었고, 어머니 또한 온화한 모습으로 가정을 지켰다. 그런 그들이 뒤늦게 뼈아픈 후회를 뱉어낸다. 우리가 뭔가를 더 했어야 했다고. 학교에서, 그리고 닫힌 방문 너머 제 방에서 아들이 무엇을 보고 듣고 있었는지 좀 더 깊이 들여다 봤어야 했다고 말이다.
학교와 집이야 안전하다고 믿었던 안일한 방관 속에서, 소년은 어른들이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괴물로 자라나고 있었다. 어른들의 시선이 닿지 않던 또다른 세계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제이미와 케이티의 관계, 그리고 살해 동기를 밝히기 위해 배스컴 경위가 학교를 찾았을 때, 그는 난관에 부딪친다. 학생들에게 이 사건은 자극적인 가십거리에 불과했고, 제이미와 케이티의 친한 친구들마저 선뜻 마음을 열지 않는다. 경위의 질문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관하거나 무성의한 대답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그들에게서 기성세대에 대한 깊은 불신이 느껴진다.
이때 경위가 미처 짚어내지 못한 아이들 사이의 진실을 귀띔해준 이는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그의 아들 애덤이었다. 애덤은 인스타그램 속 아이들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은밀한 개념들, ‘인셀(Incel, Involuntary celibate, 비자발적 독신자)’과 ‘80:20의 법칙’에 대해 알려준다.
‘상위 20%의 남성만이 여성 80%의 선택을 받는다’는 왜곡된 도식은 소년들의 세계를 단숨에 약육강식의 정글로 만들고, 여기서 낙오된 이들은 ‘인셀’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케이트가 인스타그램 댓글로 제이미를 ‘인셀’이라 저격하고 수많은 친구가 이에 동조하며 조롱을 퍼부었을 때, 제이미에게 그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닌 사회적 추방과 같았을 것이다. 집단적인 멸시 속에서 제이미의 영혼은 서서히 증오로 잠식되어 갔다.
이 왜곡된 통계와 논리는 십 대 소년들에게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실존적 공포를 주입한다.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무엇보다 중요한 청소년기에, 소년들은 연애와 섹스를 남성으로서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정의하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여성을 적대시하고 혐오하는 것을 당연한 방어기제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사건 발생 후 수개월이 지나서도 죽은 케이티에게 여전히 “나쁜 년”이라며 독설을 내뱉거나, 자신의 행동을 비뚤어진 논리로 정당화하고 변호하는 제이미의 모습은, 디지털 세계의 잘못된 서사가 한 인간의 내면을 어디까지 황폐화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비단 제이미뿐만이 아닐 것이다. 성(性)을 둘러싼 뒤틀린 인식과 열등감이 극단적인 증오 범죄로 이어지는 현실은 이미 우리 곁에 가까이 와 있다.
영화 속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을 향해 “휴대폰 좀 집어 넣어라!”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여러번 등장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학생들에게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한 채 흩어지는 공허한 소음일 뿐이다. 아이들은 교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시와 조롱으로 일관하거나 대충 시늉만 할 뿐이다. 교사는 학생들을 통제 불가능한 업무로 대하고, 학생들은 교사를 불신하는 서늘한 풍경 속에서 배스컴 경관은 냉소한다. “여기서 아이들이 뭘 배우기는 하는가. 여긴 그냥 동물우리 같다.”
교사가 영상이나 틀어주며 수업을 방기하고, 통제가 되지 않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방관하는 사이, 아이들은 책상 아래 스마트폰 속에서 익명의 멘토들이 설계한 생존 전략과 혐오의 언어를 학습한다. 교사가 말하는 허울 좋은 가치와 공허한 지식은, 당장의 말초적이고 자극적인 논리 앞에서 너무나 고루한 고어(古語)에 불과하다. 어른이 아이들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지 못하는 것은 단지 아이들의 중독 때문이 아니다. 어른이 그들이 머무는 세계의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단절 속에서 교육의 기능이 이미 마비되었음을 아이들이 먼저 눈치챘기 때문이다.
에디는 제이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다만 그 사랑은 아들의 있는 그대로를 비추는 거울이기 보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남성상의 틀에 아이를 맞추려는 조각도에 가까웠다. 에디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아들을 복싱장과 축구 경기장으로 데리고 다녔던 날들을 회상하며 뼈아프게 고백한다. 제이미가 링 위에서 제대로 싸우지 못할 때, 만년 골키퍼가 되어 골대 앞만을 지키고 섰을 때, 자신이 차마 그 광경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노라고 말이다.
찰나의 순간이었겠지만, 제이미는 그 비껴간 시선 속에서 아버지가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읽어냈을 것이다. 그것이 살인의 직접적인 방아쇠는 아니었을지라도, 소년의 내면에는 지우기 힘든 정서적 낙인이 새겨졌다. 자신의 우상인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서글픈 초라함은, 현실의 결핍을 보상받기 위해 소년을 온라인 속 뒤틀린 남성성의 세계로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자신의 범행 현장 영상을 마주한 뒤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버리는 아버지를 보며, 소년은 해묵은 수치심과 막막함을 또 한 번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내 아들도 여느 남자 아이들처럼 축구나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보다는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 같은 정적인 활동을 즐긴다. 물론 나는 최대한 그 기호를 존중하려 애쓰지만, 문득문득 불안이 엄습할 때가 많다. ‘남자아이가 저렇게 여려서 어디 가서 치이지는 않을까.’, ‘운동을 못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들. 나 역시 아이의 스케치북보다는 내가 설계한 ‘복싱장’에 아이가 당당히 서기를 은밀히 바라고 있지는 않았는가. 아이가 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실망의 그늘을 드리운 적은 없었을까.
많은 부모가 사회적 성공을 쟁취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아이들을 치열한 '성취의 경기장'으로 등 떠밀고 있다. 아이가 자신의 성향과 고유한 관심사를 바탕으로 제 안의 세계를 단단하게 구축하기도 전에 말이다. 부모가 아이의 세계를 세심하게 살피는 것은 보호자이자 어른으로서 마땅히 다해야 할 책임이자, 세상의 논리로부터 한 아이의 실존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필수적인 노력이어야 한다. 아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온전히 수용되는 경험을 얻지 못할 때, 그 정서적 빈집을 무엇이 채우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아버지가 아들의 스케치북을 함께 펼쳐보며 그 안의 세계를 진심으로 공유하려 했다면, 소년의 손에는 차가운 칼 대신 세상을 다채롭게 그려낼 다른 무언가가 들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너진 교육 현장, 진정한 소통이 부재한 가정이라는 슬픈 풍경 속에서도, 비극의 고리를 끊어낼 희망의 실마리는 존재한다. 영화 초반, 아들 애덤이 전화를 걸어와 복통을 호소하며 학교를 쉬고 싶다고 했을 때, 배스컴 경위는 이를 대수롭지 않은 꾀병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에게 아들의 복통은 그저 성가신 엄살이거나 얄팍한 회피의 수단으로만 읽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사 과정에서 거대한 벽에 부딪혔던 그에게, 아들 애덤은 결정적인 열쇠를 건넨다. 애덤은 어른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그들만의 은어와 디지털 세계의 소통 방식을 귀띔하며 수사의 물꼬를 터준다. 아버지가 그 낯선 세계의 문법을 해독하기 시작한 순간, 사건의 실마리뿐만 아니라 아들의 진실까지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 '동물 우리'라 냉소했던 그곳에서, 자신의 아들 역시 제이미와 다를 바 없이 소외당한 채 홀로 분투하고 있었음을 직감한 것이다. 애덤이 반복해서 호소하던 복통은 무시와 폭력이라는 거센 파도 속에서 보내온 간절한 구조 신호였던 셈이다.
아이들은 결코 홀로, 갑자기 괴물이 되지는 않는다. 어른들의 무심한 방관과 고립된 공간에서 배양된 뒤틀린 인식이 만나는 접점에서 비극은 잉태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아이들도 어떤 방식으로든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 누군가 안전한 울타리를 치고 마음을 열어 아이를 품어 준다면, 아이는 둑이 터진 듯 그동안 삼켜왔던 말들을 쏟아낼 것이다. 아이들의 세계를 기꺼이 들여다볼 준비가 된 어른, 그들의 서툰 언어를 인내심 있게 번역해낼 준비가 된 어른만이 아이를 ‘닫힌 방문’ 밖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
가정과 학교에서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의 구조 신호를 오독하지 않는 예민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휴대폰 좀 그만 봐!”라는 습관적인 명령 대신, “도대체 그 안에는 어떤 세상이 있니?”라고 묻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이가 자신의 스케치북을 부끄러움 없이 펼쳐 보일 수 있는 안전한 울타리를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좋은 어른’의 진짜 기능이 아닐까.
'우리가 뭔가를 더 했어야 했다.'는 참혹한 후회가 우리의 교실과 가정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너는 괜찮으냐.”고 묻고, “말해줘서 고맙다.”며 아들을 다독이던 배스컴 경위의 모습에서 나는 작은 희망을 본다. 하교하는 아들을 기다려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손을 내미는 그 일상적인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소년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는 첫걸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