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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깨비 May 29. 2018

미칠듯한 균형감 <디트로이트>(2018)

좋은 영화의 조건

*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로 작성됐습니다.     

                         

영화 <디트로이트>(2018)는 그동안 지쳐있던 영화적 갈망을 채운다. 그 영화적 갈망이란, 영화적 경험을 말한다. 그 영화적 경험이란, 영화라는 미디어만이 오롯이 줄 수 있는 체험이다. 쉽게 이해 가능한 예를 들자면, 조지 밀러의 <매드맥스:분노의 도로>(2015)나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2017)를 영화관에서 봤을 때 우리가 빠져드는 그 감정이다. 이와 견줄만한 체험을, 캐서린 비글로우의 <디트로이트>는 충분히 수행해낸다. 
   
아카데미 수상이 당연했던 그의 전작 <허트 로커>(2008)가 우리를 이라크 한복판에 내놓았다면, <디트로이트>는 인종 갈등이 극에 치닫던 1967년 디트로이트 도시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 영화가 모티프로 삼은 이른바 ‘알제 모텔 사건’의 현장인 알제 모텔, 그 현장에 내가 있는 듯하다. 이 체험은 날 것 그대로를 담아내는 감독의 시네마 베리테적 연출이 크게 한몫 한다. 여기에 우리의 눈을 대신하는 카메라가 시종일관 흔들리는 핸드헬드 기법은 우리가 바로 그 현장에 있다는 현장감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기술적인 것일 뿐, 우리가 진정으로 영화에 빠지기 위해선 극중 인물의 상황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어야 한다. 우리가 감정이입이라 부르는 그 행위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영화가 구성돼야 한다는 말이다. 알제모텔에서 총성이 울리고, 경찰들과 군인들이 그곳에 들이닥친다. 여기에 있던 흑인들과 함께 있던 백인 여성 두 명이 경찰들의 폭압에 인권이 유린당하고, 심지어 죽음까지 당하는 그 참혹함. 이 감정이 우리에게 꽂히는 것은 이 영화가 앞서 말한 미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 미덕은 바로 영화의 ‘균형감’이다. 균형감이 무너지고 어떤 인물이나 하나의 상황에 쏠리면 그것은 공감이라기보다 비굴한 호소며, 신파에 지나지 않게 된다. 대다수 우리나라 영화가 그러한데, 영화 <디트로이트>와 비슷한 주제의식을 지닌 영화 중 하나를 뽑자면 <택시운전사>(2017)가 꼭 그렇다. 영화관에서 뛰쳐나오고 싶게 만드는 그 마법은 억지 신파와 슬픔을 공감시키기보다는 울음을 호소하는 이 영화의 무너진 균형에 있다. (오해를 없애기 위해, 영화의 주제의식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완성도를 지적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영화 <디트로이트>는 핵심사건(도발적 사건)이 벌어지기 전, 충분히 그 시대와 인물들의 상황을 시네마 베리테 연출로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덕분에 1967년 미국, 그중 디트로이트 당시의 사회상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왜 흑인들이 폭동(폭동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겠지만, 우리가 5.18을 폭동이라 표현하지 않듯이)을 일으켰는지, 흑인들은 왜 저런 행동을 취하는지 뿐만 아니라, 백인 경찰들의 태도 역시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영화는 백인을 무조건적인 악으로 만들지 않고, 흑인을 무조건적인 피해자로 만들지 않는 내러티브와 연출을 선보인다. 그 시대 상황을 담담히 보여주고, 거기서 우리 일반이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감성을 추스르도록 만든다. 내가 알제 모텔에 있는 그 흑인이였다면? 내가 이들과 어울려 난데없이 성추행과 폭력을 당하는 백인 여성이었다면? 내가 이들을 몰아세우는 백인 경찰이었다면? 등등, 등장인물 모두에게 이입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에는 더욱 강력한 힘이 생기고, 인권이라는 시대정신을 다시 한 번 곱씹게 만든다. 

이 체험이 바로 영화적 갈망이요, 영화적 경험이다. 어디서 본 듯한 연출과 장면으로 오마주를 넘어 기시감으로 감정이입을 방해하는 영화나(그것만이 내 세상) 인물이 너무나 대단해서 도무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거나 긴장되지 않는 영화(꾼/닥터스트레인지) 등은 이런 체험을 결코 전달하지 못한다. 이야기에 충실하되 우리를 영화 속으로 빨려들게 하는 훌륭한 연출과 인물과 상황들이 절묘한 균형감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우리는 영화적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영화 <디트로이트>는 꼭 그런 영화다.



번외; 디트로이트의 숙명



하여간 디트로이트는 갈등의 도시인 듯하다. 내게 디트로이트는 마이클 무어의 데뷔작 <로저와 나>에 나온 황폐의 그것이었다. 호황의 산업도시였던 디트로이트. 그러나 제너럴모터스, 그러니까 우리에게도 익숙한 GM이 그곳에서 철수하면서 파산의 도시로 전락해버린다. 그 시대상이 보여주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마찰과 그 처절함이 <로저와 나>에서 감독 특유의 블랙코미디로 쓴웃음을 자아낸다. 군산에서 GM이 철수했을 때,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까닭을 여기서 참고할 수 있다. 
   
영화 <디트로이트>는 <로저와 나>가 포착했던, 그 이전의 처절한 갈등을 포착한다. 앞선 영화가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이라면 이 영화는 흑인과 백인의 그것을 말한다. 영화는 1967년에 벌어진 이른바 ‘알제 모텔 사건’을 그리는데, 국가 권력에 의해 처참히 짓밟히는 인권의 현장을 담담히 그려낸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이는 여전히 유효한 갈등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식은땀을 야기한다. 
   
이번에 발매한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배경이 디트로이트인 것은 디트로이트라는 도시가 가진 이러한 특성 때문인 듯하다. 게임의 배경은 안드로이드가 보편화된 미래 도시 디트로이트다. 게임은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갈등을 토대로 진행된다. 노동자-자본가, 흑인-백인에서 이제 안드로이드-인간의 갈등이 여기 디트로이트에서 펼쳐진다. 이는 디트로이트라는 도시가 지닌 숙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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