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푸에블라 기행과 이런저런 상념들
미혹(迷惑)의 낡은 거리
멕시코시티의 택시기사는 서툰 영어를 섞어가며, 유네스코가 어떻다는 둥, 천사의 도시(Ciudad de los Angelos) 푸에블라를 알려주려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서 나를 들뜨게 한 건 그의 말속에는 들어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두터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9월의 햇살은 멕시칸 핑크며 메리골드 오렌지며 오래된 시가(市街)의 색채에 부딪혀 눈부시게 산란하였다. 땅이 높아 하늘과 더 가까운 탓인지 피케셔츠의 옷깃이 빳빳해도 목덜미가 이따금씩 따끔거렸다. 선글라스를 벗어 머리에 얹자 어떤 햇빛이 내 눈 망막을 빠르게 훑어 세로토닌(Serotonin)*이 솟구치게 하였다.
서울에선 그저 돈 세는 기계만 같더니 내 마음도 나사 몇 개가 풀린 채 낯선 거리를 설렁설렁 헤매고만 싶었다. 그러다 지치면 그늘진 아무 곳에나 털썩 주저앉으면 될 터였다.
중년의 천사들
천사의 도시라길래 그랬을까. 내 나이 몇 살 때, 대체 왜, 그리 푹 빠졌었는지 기억조차 흐릿한 멕시코 드라마 '천사들의 합창'을 길 위에서 떠올릴 줄은 정녕 알지 못하였다.
새침데기 마리아, 안쓰럽던 흑인 소년 시릴로, 그리고 포동포동 낭만 소녀 라우라와 순둥이 뚱보 하이메... 들풀처럼 파릇하고 들꽃 송아리처럼 어여뻤던 아이들은 어느새 불혹(不惑)의 나이를 넘어섰고, 백합처럼 고왔던 히메나 선생님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순(耳順)이 되었단다.
말없이 흐르는 시간이 나를 가르친다 했거늘 그 세월이 흐르도록 대체 난 무엇을 배운 것일까 순간 의심하였다. 미혹되지 말라하고 그만 하늘의 뜻을 알라고 하면 난 아직도 그저 모호하게 얼버무리고 마는 것을. 그 아이들은 중년이 되었어도, 천사였으니, 나와는 다르겠지 싶었다.
꽃의 전쟁
포포카테페틀 화산의 그늘에서 숲이 자라고 꽃이 피어났어도 그 옛날 푸에블라 땅엔 인적이 드물었다. 전투의 색채를 바른 아즈텍 전사들이 나타나 나무 곤봉에 날카로운 흑요석(화산 유리)을 매단 '마쿠아후이틀'을 휘둘렀고, 절명(絶命) 대신 산 채로 끌려간 포로들은 심장이 적출되어 제물로 바쳐졌다. 의례의 명분으로 꽃 전쟁(Flower Wars)이라 이름하였다.
생각해 보면, 꽃과 가학적 폭력의 결합은 나를 분노케 하였다. 생일 축하한다고 꽃을 사 온 초등학생 의붓아들을 마구 때린 어느 계모의 이야기가 그랬고, 내 기억에 남편에게 죽도록 맞고 나서는 늘 꽃 선물을 받아야 했다는 폴레트 켈리(Paulette Kelly)의 자전 시(詩)도 그랬다.
"오늘 난 꽃을 받았어요! 생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뭐 특별한 날도 아니었어요."로 시작하더니, "오늘 난 꽃을 받았어요."를 자꾸만 반복하였다. 그리고는 의례적 근조(謹弔) 꽃다발을 받는 것으로 그 시는 끝이 났다.
천사의 도시
16세기, 스페인 침략자들은 총과 균으로 아즈텍을 짓밟았다. 탐욕을 쫓다 금세 지루해진 용병들과 복음을 펼치려는 성직자들은 도시와 성당을 필요로 하였다. 바로 그때 주교의 꿈에 키가 크고 긴 머리와 투명한 눈을 가진 천사들이 나타나서는 꽃 전쟁을 치르던 땅 위에 도로와 건물과 성당이 들어설 자리를 표시하였고, 1531년 푸에블라가 생겨났다.
푸에블라 대성당의 70미터 높이 종탑에 8톤 무게의 종을 거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끝맺음을 어려워하자 천사들이 또 나타나 종을 높이 들어 올렸다. 내가 꽃이었을 시절의 서사는 지나 보니 깨진 꽃병의 유리조각에 남은 희미한 잔상일 뿐이건만, 오백 년 된 도시의 하늘과 햇살과 색채에는 천사의 흔적이 완연하였다. 그 거리를 설렁설렁 걷는 것조차 천사가 무거운 종을 들어 올려 어느 애타는 가슴들을 달래던 것 같은 따스한 위로가 되었다.
미식의 도시
푸에블라가 몰레 포블라노(Mole Poblano) 소스의 원조라고 하더니, 지나치던 성당 앞에서도 비닐봉지에 시커멓게 담아 팔던 몰레를 볼 수 있었다. 백종원 씨가 처음 몰레 맛을 보고는 "어떻게 나에게 맞는 음식만 있겠어요."라고 반응했다기에 호기심이 동하여 그것 한 봉지 사볼까도 싶었다.
역사지구 남쪽 끝자락의 아우구리오(Augurio) 레스토랑을 검색해 찾아들었다. 몰레를 따로 한 접시 주문했더니, 식전빵에도 고기요리에도 몰레가 빠지지 않았다. 소스가 메인이 된 밥상이 차려졌다.
초콜릿에 안초칠리, 플랜테인(요리 바나나), 계피, 아몬드와 호박씨를 섞고 정향과 아니스 같은 향신료를 더하여 푹 달여낸다더니, 졸아든 한약 같은 색깔에 달고 쓴 초콜릿 풍미가 무척 흥미롭다가도 금세 식상해졌다. 진미의 음식을 안주삼아, 대낮부터, 마르가리타 칵테일과 네그라 모델로 맥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길가에 피어난 위태로운 꽃 한 송이
취기가 가시지 않은 채 거리에 나선 탓인지 "라 쿠카라차 라 쿠카라차 아름다운 그 얼굴" 흥겨운 노래 한 소절을 소리가 날 듯 말 듯 흥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라 쿠카라차'가 '바퀴벌레'란 뜻이고 민중 투쟁의 비애이자 염원을 빗댄 것임을 곱씹자니 팔라폭시아 도서관이 가까워오는 길 위에서 껌팔이 소년과 맞닥뜨렸다.
껌통을 힘껏 내밀지도 못하면서, 무례한 찰칵 소리에 슬쩍 올려다보는 새까만 눈동자는 앳된 염원을 감추지는 못하였다. 고기 타는 연기가 뿌연 술집에 앉아 소맥 한 잔 들라치면 껌통을 쑥 내밀곤 하던 어느 옛날 할머니가 그 눈동자에 담겼다. 나이트클럽에서 껌을 팔다 '한국의 폴 포츠'가 되었건만 죽은 지 한 달이 되어서야 냉동고에서 꺼내졌던 최성봉이란 청년의 비극을 소년의 구멍 난 바지를 보며 다시 기억하였다.
이 소년만큼은 척박한 땅과 모진 가뭄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멕시코 가시양귀비 새하얀 꽃으로 자라나기를 바랐다. 어린 날엔 껌을 팔아 돈을 세더라도 다 자라서는 야무진 꿈을 잘 키운 덕에 탐스런 꽃송이들을 수확하여 세고 있기를 바랐다.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독립문의 이진아 도서관을 지나칠 때면 가끔 떠오르던 김준태 시인의 시가 이곳에서 다시 떠올랐다. 부끄러워져서, 다시 길을 걸었다.
팔라폭시아 도서관 안마당에 핀 오렌지 자스민 꽃
1646년에 지어진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에 들어섰다. 팔라폭스(Palafox) 주교는 자신의 도서관을 이곳에 기부하면서 누구나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 하나를 걸었다.
도서관을 내려오자, Casa de la Cultura(Culture House) 안마당에선 때마침 어여쁜 여인들이 한데 모여 춤을 추고 있었다.
여인들은 짙은 속눈썹으로 한껏 꾸몄고, 레이스로 가득 찬 하얀 드레스를 입었으며, 반다나가 달린 작은 앞치마를 허리에 둘렀다. 대형 스피커에서는 마리아치가 바로 곁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강렬한 사운드가 뿜어져 나왔고, 여인들은 리듬을 쫓아서 꽃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도 모른 채 나풀나풀 스텝을 밟았다.
'당신은 나의 것'이라는 유혹적 염원을 품은 오렌지 자스민의 새하얀 꽃잎들이 살랑살랑거리더니 어느새 어여쁜 소녀가 되어있었다. 다시 깨어날 때까지 계속해서 황홀한 푸에블라 왈츠를 출 것만 같았다.
삶은 여러 겹의 나이 듦을 비집고 나와 늘 새로운 오늘을 사는 것이라고 하더니, 무지개처럼 여러 겹으로 밝게 소용돌이치는 치마를 꼭 쥐고서 종종 거리는 스텝으로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이 마치 향기가 무척이나 그윽하여 죽은 자를 저승으로까지 인도한다는 메리골드 꽃송이들 같더니, 노란 빛깔과 오렌지 빛깔의 고운 꽃들이 역시나 어여쁜 소녀로 활짝 피어났다.
치맛자락이 휘날리고 꽃잎이 흩날리고 꽃향기가 퍼져나갈 때 고운 자태에 취해서 고혹적인 꽃 향기에 취해서 곱디고운 그 빛깔에 취해서 그만 펑펑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저 나이가 되어 보지도 못한 채, 아니 지금의 나 보다도 적은 나이에, 치맛자락 한번 휘날려 보지도 못하고 떠나버린 우리 엄마 얼굴이 겹쳐 보여서 그랬던 건 절대 아니라고 혼자서 모호하게 얼버무렸다.
"세뇨리따, 저랑 춤 한번 추실까요?" 치맛자락 움켜잡은 쪼글쪼글한 그 손을 살포시 잡아 보고만 싶었다.
에필로그
2월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아직 눈도 다 녹지 않았을 텐데도, 설악산에도 무등산에도 아무르 아도니스(복수초(福壽草)) 샛노란 꽃이 피어났다는 뉴스가 연일 올라왔다. 그때마다 푸에블라의 춤추는 소녀들과 메리골드의 짙은 노란 빛깔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세로토닌은 햇빛을 받아 분비되며,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울 때 많이 분비된다. 정서적 안정감, 소소한 일상이 주는 행복감, 그리고 공감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