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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날 네덜란드 바다와 그 카페

네덜란드 마르켄

by 블루밍드림

입춘대길


입춘의 전날밤. 메모장 한 장을 뜯어내어 눈대중으로 대충 자른 다음 나름 일필휘지로 '立春大吉' 네 글자를 적어 넣었다. 붓글씨도 아니고 0.7mm 검정 볼펜으로 눌러쓴 초라한 행색의 축문일망정 현관문 안쪽 내 시선이 반듯이 닿는 곳에 스카치테이프로 고정하여 붙였다. 먼 기억 속 데면데면하던 앞집 아저씨가 써 붙이던 것을 바라본 적은 있어도, 내가 그리할 줄은 몰랐다.


소한(小寒)이 지난 어느 날 이화동 언저리를 서성거렸다. 행여 누가 볼세라 어느 허름한 집 문을 찾아 황급히 두드렸다. 시름시름 앓아오던 '낙담'의 병은 겨울을 지나며 증상이 날로 심해졌다. 근무시간 고층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는 도도한 한강 물줄기도 더는 도움이 되지 않는 지경이었다.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네요."

"......"

"분명 내 것이어야 했는데..."

"왜인지 알 것 같아요."

"네...?"

"지난 2년 동안 운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일이 될 리가 만무하지요. 기력이 쇠할 때 이런 운이 든다면 그 사람은 죽을 수도 있어요. 다행인 건 이런 운이 다시는 없겠네요."

"네...!"

"을사년 푸른 뱀의 해부터 '내게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싶을 만큼 좋아질 겁니다. 앞으로 삼 년 동안 관운(官運)이 들었어요. 아, 그리고, 입춘이 새해의 첫날이에요."


매 앞에 장사 없다더니, 출세운이 강한 사람은 코 꿰인 소 같은 예스맨이 될 거라던 어느 칼럼니스트를 향한 오랜 지지를 과감히 철회하였다. 선문답(禪問答) 사주풀이는 부항기가 되어 가슴 깊이 응집된 어혈(瘀血)을 잘도 뽑아내었다. 그 집을 나서 창경궁 돌담길을 걸었다. 서글픔이 복받쳐온 까닭은 끝내 알지 못하였다.


행여 기대가 깨어질까 두려워져 입춘 전날의 긴 겨울밤을 못 이겨 입춘방(立春榜)을 적었다.


어느 봄날의 그 카페


입춘인데도 서울의 한낮 기온은 영하에 머물렀다. 갓 내린 커피의 온기에 기대어 딱히 무얼 해 보겠다는 생각이 없는 시선으로 사무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 봄날 암스테르담 아랫동네 우리 집 손바닥만 한 화단에 크로커스가 피어올랐다. 암스텔(Amstel) 강을 따라가는 둑길에도 새하얀 그 꽃들이 피었다. 어느 봄날 하를럼(Haarlem) 넓은 들에는 빨갛고 노랗고 더러는 보랏빛의 튤립꽃이 흐드러졌고, 상춘객 북적이는 쾨켄호프(Keukenhof)에는 연분홍 벚꽃 잎이 봄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그리운 줄 알면서도 부러 돌아본 적 없는 지난 봄날의 스냅숏들이, 한잔 커피가 미세하게 온기를 잃어갈 즈음, 창 너머로 내게 찾아왔다. '그래, 그랬었지. 그런 때가 있었지.'


"그리움은 과거라는 시간의 나무에서 흩날리는 낙엽이고, 기다림은 미래라는 시간의 나무에서 흔들리는 꽃잎이다." 이외수의 시(詩)만으로는 입춘이 되어서도 올똥 말똥한 서울의 봄은 그리움인지 기다림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우두커니 앉아, 봄의 기억을 더 찾는 듯, 창밖을 응시하였다.


폴렌담


어느 햇살 좋은 아침이었다. 암스테르담을 한 바퀴 감아 도는 A10 고속도로를 동북(東北)으로 빠져나와 그 길 끝에서 옛날에는 남쪽바다(Zuiderzee)라 불렸다던 네덜란드 내해(內海) 깊숙한 곳에 다다랐다.


폴렌담(Volendam) 사람들은 그 바닷가에서 태어나 역시나 바다에서 태어난 후 강으로 올라와 살아가는 뱀장어를 잡으며 살았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작은 섬 마르켄(Marken)의 사람들도 오랜 세월 별 다를 게 없이 살았다.


마르켄


1932년 네덜란드 대제방(Afsluitdijk)이 놓이며 남쪽바다는 북해와 단절되어 에이셀호(IJsselmeer)라는 이름의 거대한 호수로 변하였다. 고깃배 드나들며 비린내를 풍겼을 부두엔 요트가 즐비하고 해변을 따라서는 기념품 가게며 레스토랑이 줄지어 들어섰다.



폴렌담 바닷가는 그날따라 짧은 머무름만으로 스치듯 지나쳤다. 그리고는 제방길로 멀리 둘러 마르켄으로 향하였다. 거기라고 여태 염수(鹽水)의 바다로 남았을 리 없고, 뱀장어 풍어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어부들을 볼 수 있지도 않겠지만...



마르커메르(Markermeer)라고 또 다르게 불리는 그 바닷가엔 겨르로운 봄날에 아주 잘 어울릴 법한 외로운 등대가 있었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는 그 등대와 헤어지지 못하는 해가 아주 잘 드는 카페도 있었다.




그곳 카페는 남쪽과 서쪽의 사이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기운 방향으로 테라스를 내었다. 따뜻한 카페 라테와 시원한 맥주잔을 놓고서 손님들은 하릴없이 햇살을 쬐고 앉았다. 불문율인 듯 모두들 같은 방향으로 앉았고, 남남동(南南東) 낮은 하늘에서 햇빛이 내려와 이따금 지나는 이들 옆으로 제법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르켄 바닷가 카페의 풍경은 단조로웠다. 탁자 위에 과자 부스러기라도 떨어질라치면 어느샌가 참새 여러 마리가 날아와 겁도 없이 탁자 위에 내려앉았다. 그 바다를 나는 갈매기는 가끔씩 사람들 앉은 근처에 똥을 싸 떨구었지만 어느 누구도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달달한 커피 몇 모금에 연신 하품을 해대어도 시간이 몇 시를 흐르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그때라고 세상 사는 걱정이 어찌 없었겠냐만, 세월이 흘러 겨르롭기 짝이 없던 그렇고 그런 봄날이 이렇게나 그리울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에필로그



대개는 고단함에 짓눌린 채 맞이하는 주말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퀭한 눈으로 차를 몰았다. 한옥마을과 진관사를 스쳐지나 북한산 가까이 스O벅스 창가에 앉았다. 입춘이 지났어도 아무래도 내게 봄은 긴 기다림일 것만 같았다.


창 너머 의상봉엔 겨르로운 겨울날의 첫 해가 걸렸다. 마치 빛의 왕관을 쓴듯 하였다. 뭔가 길한 조짐이 가까운듯하여 가만 앉았지못하고 연신 몸을 뒤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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