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드디어 끝났어.
폭염이 계속되던 2024년 9월 2일, 나는 용산의 한 고등학교를 걸어나오고 있었다. 혼이 반쯤 나간 상태로 학교를 걸어나오는 한 무리의 인파 속에 내가 있었다. 우리는 이틀 간 수십장의 답안지를 작성했고, 안 그래도 안 좋은 손목과 허리는 너덜너덜해졌다. 교실을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길에 나는 아무런 생각도, 말할 기운도 없었다. 어서 집에가서 쉬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머리는 백지상태였다. 아니, 투명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사람이 자기 머릿 속에 든 모든 것을 긁어모아 쏟아낸 후에는 이렇게 정화된 내면상태가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묘하게 들뜬 흥분감을 동반한 약간의 카타르시스도 있었다. 정문에 다다르니 마중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비로소 시험이 끝났다는 사실에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마중 나오기로 한 아내가 어디있나 살피기 시작하는데, 뒤에서 누가 엉엉 울며 전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나 드디어 끝났어!!"
목소리가 어린 학생같지는 않았다. 힐끔 돌아봤더니, 적어도 50대는 되어보이는 아주머니셨다. 나이 든 성인의 우는 모습을, 그것도 목놓아 엉엉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어른'이란 늘 단정하고 성숙한 모습과 체면으로 표현되는 '괜찮은' 존재였는데, 어른도 이렇게 많은 걸 내려놓고 소리지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전화 너머에 같이 울고 계셨을 칠순의 할머니 모습이 그려졌다. 갑자기 인천에 계신 엄마 생각이 나 가슴이 먹먹해지려는 찰나에, 이번에는 어떤 꼬마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엄마다 엄마!!"
이제 막 말문의 틔였을 작은 꼬마가 내 또래의 아버지와 손잡고 달려오고 있었다. 내 뒤에서 "ㅇㅇ아~"하며 달려나가는 젊은 엄마가 있었다. 세 가족이 서로 끌어안고 길 한복판에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무척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서로 반갑게 끌어안으며 기뻐했다. 수고했다는 말들이 학교 앞 정문을 가득 메웠다. 20대 학생들부터 4-50대 어른들까지 모두 마중나온 가족들의 축하와 격려를 받았다.
수능을 두번이나 보았을 때도 느껴본 적 없던 감정이 올라왔다. 입시나 취업과 같은 경쟁을 해냈을 때와는 감정의 깊이가 달랐다. 그저 당연히 해내야하는 또래들과의 경쟁을 '잘' 해내야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어서 잘 마친 이후에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공인노무사 시험은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전히 내가 '하기로' 선택한 것이었고 또한 응시하는 사람들 또한 특정 세대로 제한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회계사, 세무사 시험과 달리 노무사 시험은 마치 공인중개사시험처럼 응시연령대 폭이 크다.) 결국 이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수험에 진입하는 이들의 사정 또한 제각각이었다. 은퇴를 바라보는 시기에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 경력단절 후 다른 직업을 찾기 위해 도전하는 사람, 나처럼 맞지 않는 회사생활을 참다참다 30대에 큰 모험을 시도하는 사람 등 노무사 수험판은 특히나 응시자들의 스펙트럼이 넓었다. 저마다 이런저런 사정들을 안고 도전하는 어른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인생의 여러가지 풍미가 나는 시험이기도 했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의 풍미를 풍기는 수험생이었다.
끝끝내 답안지에 '이하 여백'을 쓰고 나왔고, 스스로 무너지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절로 눈물이 났다. 모두가 출근하는 아침에 스터디카페로 향하며 '과연 이 시험을 준비하는게 맞는건지'를 고민했던 숱한 날들과, 아픈 손목과 허리를 억지로 앉아서 버티며 책장을 넘기던 날들이 스쳐지나갔다. 하루에도 여러번 포기를 고민했던 나는, 그럼에도 돌아갈 곳은 없다고 스스로를 막다른 길에 두고 다시 책상 앞에 주저앉혔던 나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완주했다.
용산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내를 만나 같이 쌀국수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