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도시 이카(Ica)로 떠난 한국인과 페루인 열두 명
스페인어를 전공한 덕에, 페루 리마의 한국 공공기관 사무소에서 인턴 신분으로 2018년 하반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타지 생활의 고충을 항상 걱정해 주시는 상사 분들, 언어가 부족했던 제게 몇 번이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며 업무를 도와준 페루인 동료들 덕분에 잊지 못할 경험을 쌓았죠.
그중 가장 인상 깊고 꿈결 같은 추억은 팀 스피릿(Team Spirit) 행사였습니다. 해외사무소 파견 직원들과 현지인 직원들이 더 가까워지고 업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기회였죠. 다른 사무소들은 방탈출 게임, 영화관 방문, 회식 등을 선택했지만 페루 지부는 뭔가 색다른 하루를 기획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택한 것은 바로 사막 와이너리 방문이었습니다
이미 페루를 여행해 본 분이라면, 또는 페루 여행을 계획 중인 분이라면 리마의 근교 도시인 '이카(Ica)'에 대해 들어보셨을 듯합니다. 해변을 끼고 있어 온난다습한 리마와 달리, 이카는 흙먼지와 모래가 가득한 사막 도시입니다. 오아시스 마을로 유명한 와카치나(Huacachina) 투어로 관광객의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죠.
리마에서 이카로 이동할 때,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면 해변 쪽을 향해 펼쳐진 드넓은 포도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카 인근에는 페루에서 가장 유명한 술의 이름이자 마을명인 ‘피스코(Pisco)’가 있어, 피스코 술과 지역 와인을 저렴하게 맛보고 구입할 수 있는 와이너리촌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모래 썰매를 즐기기 전 이카 사막에 숨겨진 와이너리에서 신의 물방울 한 잔, 즐겨 보시면 어떨까요?
이카 와이너리 투어를 선택한 이유는?
팀 스피릿으로 방문한 와이너리의 이름은 타카마(Tacama)입니다. 이곳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인 만큼, 역사가 깊은 전통주뿐만 아니라 이카 지역 전통 공연 등 즐길 거리가 풍성했기 때문이에요.
모든 투어에는 기본적으로 와인 또는 피스코를 맛보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에 네 가지 종류의 와인을 추가로 시음하는 'Cata de Vino'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당연히 업무 분위기 완화와 협업 능력 증진을 위해(...) 까따 데 비노 옵션 역시 추가했죠!
타카마 와이너리는 그 역사뿐만 아니라, 딸기우유를 연상시키는 분홍빛 건물과 정원으로 유명합니다. 제가 방문했던 9월은 포도 수확 철이 아니었기에, 영근 포도를 구경할 수 없어 아쉬웠어요.
하지만 포도밭과 각종 꽃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전경을 바라보며 페루 피스코와 와인의 역사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노라니, 마치 사막이 품고 있는 핑크빛 오아시스에 들어온 듯 비현실적인 공간에 서 있는 듯했네요.
다음으로 전통식, 현대식 주조 시설을 둘러보며 피스코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피스코는 와인을 활용해 만드는 페루 대표 증류주인데요, 발효가 완료된 와인을 증류하면 38°에서 48° 사이의 맑고 투명한 술이 추출됩니다. 이러한 공정 덕분에 한 와이너리에서 두 가지의 주류를 생산해 낼 수 있죠.
피스코 원액은 도수가 높고 특유의 향이 센 편이기에, 대개 피스코 사워(Pisco Sour)라는 칵테일로 제조해 마십니다. 남미를 통틀어 가장 인기가 많은 칵테일이기도 하죠. 피스코에 라임즙과 부드러운 머랭을 올려, 자극적인 음식과 어우러지면 아주 잘 어울리며 더운 날씨에 사라진 입맛을 되찾기에 제격입니다.
피스코와 페루 와인 맛보기
자,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페루 전통주 시음 시간입니다. 더운 날씨에 어울리는 와인과 피스코가 여러 종류 놓여 있었는데요, 와인은 따로 마련된 보관실에서 시음할 예정이므로 먼저 피스코부터 맛보기로 합니다.
술을 잘 마시는 일행들도, 피스코 원액을 맛보고는 ‘식도가 타는 고통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역시 40도가 넘는 독주인 만큼, 그대로 마시기에는 굉장히 강한 편입니다.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즉석에서 주스를 섞은 피스코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피스코는 특유의 기분 좋은 단맛이 음식의 산미를 부드럽게 완화해 주기 때문에, 페루의 인기 전통음식인 세비체(Ceviche)와 잘 어울립니다. 또는 부드러운 노랑고추 소스를 끼얹은 닭요리 아히 데 가이나(Aji de Gallina)에 피스코를 페어링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이제 프라이빗한 지하 공간에서 와인 시음이 진행됩니다. 이 저장고는 지하 7.5m에 지어져, 서늘한 온도를 연중 유지하기에 알맞다고 합니다. 흙향과 오크통의 향이 부드럽게 어우러져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어요.
와인을 한 종류씩 시음할 때마다 어떤 느낌이 드는지 한 마디씩 이야기하고, 또 치즈와 건과일, 견과류 등의 안주와 페어링 하며 각 술에 맞는 안주를 찾아보는 시간 역시 가졌습니다.
페루의 음악과 술로 채우는 오후
와인 시음을 마친 후, 와이너리 내 레스토랑에서 점심시간을 가졌습니다. 조금 전 시음해 본 와인 중 맘에 드는 제품을 곁들여, 아름다운 시설 전경을 바라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금방 식사가 제공되었습니다.
레스토랑에서는 페루 중부 지방 전통 요리를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레드와인과 가장 잘 어울렸던 요리는 로모 살따도(Lomo Saltado)인데요, 소 등심과 각종 채소를 간장 베이스 소스에 볶아 한국인이 환영할 만한 맛이 나는 메뉴입니다.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받은 레시피가 많아, 페루 음식에서는 대체로 우리에게 친숙한 감칠맛이 느껴집니다.
식사가 무르익을 때쯤, 중정에서 멋진 공연이 열렸습니다. 말을 타고 원을 그리며 추는 전통 무용, 그리고 기타 소리가 감미로운 전통 음악이 와이너리 투어의 마지막 순서를 장식하니, 팀 스피릿을 더욱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이카가 리마의 근교도시라고는 해도, 국토가 꽤나 넓은 페루이기에 왕복 일고여덟 시간이 족히 걸리는 대장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환상적인 날씨와 그림 같은 풍경을 만끽하고, 또 술의 힘을 빌려 페루인 동료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에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 장의 엽서처럼 선명히 남은 추억입니다.
피스코처럼 투명한 눈으로 동행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와인처럼 은은한 기억을 남긴 이카 여행. 여러분에게도 한 잔의 향기로운 술처럼 마음에 새겨진 경험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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