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을 산 흡혈귀와 그 고요 (2)

시간에 대한 감각

by 하도


아무리 그래도 이 글의 구성상, 간단한 줄거리 요약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다. 다만 이 글은 게임 자체를 소개하는 글이 아니고, 줄거리는 내 빈약한 기억력에 의존해서 다시 쓰는 것이므로 정보의 정확도에 관해서는 너무 믿지 말기 바란다. 자세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게임을 시작한 플레이어는 위쳐를 조종하게 된다. 위쳐가 뭐냐 하면, 약물을 사용해서 돌연변이로 개조된 몬스터 헌터다. 정확히 말하면 돈을 받고 용병처럼 괴물들을 사냥하는 그 직업군 자체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각각의 위쳐들은 자기만의 이름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데, 내가 플레이하는 주인공 이름은 ‘개롤트’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른 인물들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 그냥 위쳐라고 부르겠다. 이름은 이 글에서 중요하지가 않다. 그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게임이 시작되면 위쳐는 연쇄 살인 사건을 조사해 달라는 의뢰를 받아, 대륙 한 모퉁이에 붙어있는, 포도주 산지로 유명한 어느 도시국가를 방문하게 된다. 치밀한 조사 끝에 범인이 밝혀지는데, 인간이 아니라 흡혈귀다. 위쳐는 그 흡혈귀 뒤를 쫓다가, 그 뒤에 놓여있던 보다 복잡한 내막을 발견한다. 그 흡혈귀는 한 인간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연인은 누군가에게 납치당했고, 그 납치범이 흡혈귀에게 자기 연인을 살리고 싶다면 특정 인물들을 죽이라고 살인을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다시 반전처럼 더 많은 진실이 드러나는데, 그 모든 상황은 그 여자의 조작극이었던 것이다. 여자가 개인적인 복수에 그 흡혈귀를 도구처럼 이용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거짓 사랑을 시작했던 것이다. 자신의 종을 초월한 사랑이 사실은 전부 기만이었음을 알아차린 그 흡혈귀는 불같은 분노에 휩싸였고, 깊이 상처받은 그 분노를 풀기 위해 다른 흡혈귀들을 불러 모아 그 도시 전체를 공격한다. 기만적인 실연의 상처가 인간 전체에 대한 분노로 확장된 것이다. 박쥐처럼 하늘을 뒤덮은 흡혈귀 떼가 인간이라면 눈에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죽이는 그 대학살극 속에서, 위쳐는 그 도시를 구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흡혈귀를 죽이고, 학살을 중단시키고, 도시는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뭐 대략 이런 이야기다.


전체적인 스토리의 플롯 구성은 블록버스터 게임답게 대중적이지만, 그 짜임새가 아주 수준 높고, 게임이라고는 믿기 힘든 섬세한 디테일과 풍부한 대사를 한가득 담고 있다. 특히 대사의 문장 수준이 높아 영어 공부하기에도 좋다. 덤으로 음성지원까지 된다. 아무튼.


이 스토리에서 내 상상력을 사로잡았던 부분은 따로 있다. 흡혈귀 떼가 도시를 공격하고 아비규환이 펼쳐질 때, 위쳐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당연하게도 사랑에 상처받고 복수심에 날뛰는 그 흡혈귀를 찾아내서 잡아 죽이는 것이다. 그 흡혈귀가 무대 뒤에서 그 대학살을 지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 숨었는지 모르는 그 흡혈귀를 어떻게 찾아낼지가 이 상황의 관건인데, 게임은 플레이어가 고를 수 있는 두 가지 선택지를 준다. 하나는 이 모든 소동의 원흉인 그 여자를 찾아내서 흡혈귀를 유인하는 방법. 또 다른 하나는, 이게 정말로 재밌었는데, 그 주동자 흡혈귀를 강제로 소환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단다. 그 도시 외곽에 숨어 살고 있는 200년 묵은 원로 흡혈귀를 찾아내서 이야기가 통하면 그 문제의 흡혈귀를 강제로 끌어낼 수 있을 거란다. 그 세계의 흡혈귀 조직은 나이에 따라 위계질서가 잡혀있어서, 원로 흡혈귀의 명령이라면 그도 거역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두 번째 루트가 내 호기심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난 망설임 없이 이 선택지를 고르고, 그 흡혈귀가 숨어 있다는 도시 외곽의 깊숙한 지하 동굴을 찾아갔다.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온갖 함정을 피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공간을 뒤트는 마법 트릭으로 가득한 통로를 거쳐, 나는 마침내 그 원로 흡혈귀와 마주한다.


한 도시의 운명이 걸린,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그 은신처 동굴 안으로 한 발 내디뎠을 때, 그는 박쥐처럼 동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고요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당신의 일족이 우리 인간들을 죽이고 있느니, 이 무의미한 살육을 중단시키게 도와달라고. 그러자 그가 눈도 뜨지 않고 되묻는다.


“내가 너희 인간들을 도와주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너희가 떼죽음을 당하건 말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그 질문에 대답할 말을 생각하는 내 눈앞에 대화 선택지 두 개가 반짝거리는 환영처럼 떠오른다. 도시와 사람들을 그 의미 없는 대학살에서 구해 내려면 신중하게 골라야 할 것이다.


나는 두 번째를 고른다.


“먼저 우리를 도와줘. 그럼 보답으로 나도 언젠가 당신을 도와주겠다.”


그러자 그 흡혈귀가 흥 코웃음을 날린다.


“날 도와주겠다고? 너 따위가? 네가 뭐 그렇게 대단한 줄 알아?”


그러더니 위쳐를 말도 안 되는 힘으로 일격에 죽여 버린다. 나는 그 자리에서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탁' 치니 '억' 내 비명은 짧은 외마디였다.


게임 오버.


아,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방금 그처럼 어이없게 죽어버린 주인공 캐릭터는, 보통 인간들과는 급이 다른 존재다. 그는 약물로 개조된 돌연변이 유전자에 특수 훈련을 받은 몬스터 헌터다. 백 살이 넘게 살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런 존재다. 또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최소 몇십 시간을 투입하며 키워 온 감정 이입이 되어있는 존재다. 그런 캐릭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전투 시도조차 못해보고 모기 한 마리가 때려 잡히듯 한 순간에 바로 죽어버렸다.


나는 내가 그렇게 어이없이 죽었다는 사실에 잠시 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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