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자유 Oct 25. 2017

저는 _______ 입니다

내 부끄러운 라이프 스타일


자유로부터의 도피


난 항상 (안 좋은 의미로) 남들과는 다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TV 프로나 연예인에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었고, 최신 곡도 모르고 집안 상황도 친구들과 좀 다른 것 같고.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주로 내가 모르는 주제들이었고, 재미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그들을 이해할 수 없듯, 나 역시 그들에게 이해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야말로 비주류 인생이었다.


그렇다고 '개썅마이웨이'가 가능한 인간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혼자가 된다는 건 너무 무서웠다. 간절하게 주류에 속하고 싶었고, 차라리 나를 숨기고서라도 그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넌 뭘 좋아하냐'는 질문에 답도 못 하겠더라. 한참을 생각하다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모르겠어,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하고 눈을 피했다.


나만 겪은 특별한 일인 것처럼 말했지만 이는 모두가(거의 대부분이) 겪는 고민이다. 한 사회심리학자는 이를 현대인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즉 자신의 개성을 지키는 자유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혼자만 튀는 건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데에서 오는 안정을 위해서는 개성 따위, 기꺼이 포기한다.




고백 중독


언제부터인가 나를 드러내는 일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어떤 자리에서건 내 생각을 밝히지 않았고, 굳이 밝힐 일이 없다 보니 딱히 생각이란 걸 하지도 않게 됐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항상 다른 사람을 찾았다. 네이버 지식인을 샅샅이 뒤지거나 어른스러운 친구를 데려다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묻고, 부모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물었다. 그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선택했다.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내 선택의 기준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였다. 생활의 모든 부분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꼭두각시처럼.


꼭두각시의 인생은 불안하다. 인생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는 건 매 순간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니까.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했고, 다행히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다. 그 노력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꼽자면 아마 처음으로 치부를 동생에게 털어놓았을 때였던 것 같다. 당연히 비난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에 용기를 얻었다. 이후로 똑같은 일을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했고, 반응은 비슷했다. 나중에 다른 친구에게 '나도 그런 적 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땐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런 '고백'에 거의 중독되다시피 했다. 고백을 할 때마다 남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도, 심지어 비난하고 혐오하는 것이라도,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 기분이었다. 개성을 되찾는다는 건 생각보다 멋진 일이었다. 기회만 되면 그런 치부들을 드러냈고, 나중에는 굳이 그걸 치부라고 생각하지 않게까지 되었다. 사실 맞는 말이다.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잘못은 아닌데 부끄러운 이유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왜 당당하지 못할까. 기회만 되면 치부를 드러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결국 '이해해줄 만한 사람'에게만 한정된 것이었다. 내가 말하는 기회란 내 치부를 듣고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이해해보려 애써주는 사람을 만나는 때였다. 그들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역시, 이건 잘못된 일이 아니지.' 확신했다.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두통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어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당신은 추리나 선택을 잘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불쾌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에픽테토스의 말에 파스칼은 답한다.

"우리는 두통을 앓고 있지 않다든가 절름발이가 아니라는 데 대해서는 확신을 갖고 있지만, 진리에 대한 선택에는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 파스칼, <팡세>


그러던 중 파스칼의 글을 읽고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결국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당당하지 못하고 일부에게만 오픈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다. 확신할 때라곤 타인이 인정해주는, 그 순간뿐이었다.




가판대 남자


그래서 항상 내 이야기를 듣고도 비난하지 않을 사람을 기다렸다. 그 외의 경우엔 나를 철저히 숨겼다. 물론 편한 점도 있었다. 말하지 않는 이상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만 나를 판단할 것이고, 그럼 좋은 모습만 보여주면 되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래전에 읽어서 원문을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두 남자가 길거리를 가다가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는데, 주인이 그들을 아주 퉁명스럽게 대했다.

"장사하는 사람이 저렇게 불친절해서야. 아침부터 기분만 잡치는군."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보오. 허허."
"자네는 화도 안 나는가? 어떻게 저런 대접을 받고도 웃을 수가 있나?"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저 남자의 태도 때문에 내 기분을 망쳐야 하나?"

*나는 이 남자를 '가판대 남자'라고 불러왔다.


가판대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나도 가판대 남자가 될 수는 없을까? 내 행동을 결정하는 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일 수 없을까. 듣는 사람이 누군지와 상관없이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을까.


생각해보면 내 주변에도 가판대 남자가 많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신념을 확고하게 드러내서 자신만의 색깔을 뿜어내는 사람들. 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건, 듣는 사람이 잘 들어줘서였던 적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의 당당한 고백을 보고 영감을 얻었을 때가 오히려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가판대 남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본인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의 인정 없이도 자신을 사랑하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다른 이에게도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나 역시 또 다른 가판대 남자가 되기 위해, 즉 내 존재를 스스로 인정하고 또 그런 모습으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싶은 바람으로 내 부끄러운 라이프 스타일을 공개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