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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어른이도 풍선이 좋답니다

어린 날의 꿈과 어른

by 이부

길거리에서 풍선을 받은 적이 있다. 귀찮게 그런걸 뭐하러 받느냐는 친구의 핀잔에도 꿋꿋히. 그 풍선을 손에 꼭 쥐고서 조심 조심 사람들 틈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한 20분 정도 걸은 뒤 풍선을 무사히 우리 집에 데려갔을 때 엄마 아빠의 반응.

“우리 딸은 아직도 동심이 넘치나봐~ 예쁘긴 한데 거추장스럽다야”

맞다. 풍선을 집으로 데려오기까진 사실 무지 거추장스러웠다. 가볍게 두둥실 떠오르는 풍선은 분명 내가 줄을 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 흔들 멋대로 흔들리고 가끔은 내 얼굴을 퉁 퉁 치기도 했다. 가벼워서 살짝만 잡고 있어도 날아가지 않지만, 그만큼 방심하면 쉽게 날아가 영영 잡지 못하게 되는 것이 풍선이기에 계속해서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흰색 풍선을 놓기 힘들었다. 조금 가지고 놀다가 터트려 버려지는 풍선. 그게 마치 내 꿈과 같아서. 25살의 나는 멋 드러 진 풍선 하나 키우지 못해서 하늘로 떠오르지도 못한, 그리고 아무런 풍선도 손에 쥐고 있지 못한 못난 어른이었다.


꿋꿋하게 함께 했던 풍선

아이들은 수많은 풍선을 쥐고 있다. 나도 아이일 때, 마치 놀이동산에서 색색깔로 동심을 유도하는 피에로 아저씨 마냥 수많은 색의 풍선을 작은 고사리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좋아하는 곡만 치고 싶어 하는 고집 센 아이였으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고, 수학은 싫었지만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하면 할수록 유창 해지는 영어공부가 재밌어서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었고, 미술은 좋지만 재능이 부족하다는 소리에 화가 대신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며 꿈을 가지기도 했다. 친구들은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고 심리 상담사가 되어 보라는 추천도 숱하게 들었다.
분명 그랬다. 어린 날의 나는 분명 꿈이 너무너무 많아 고민인 팔방미인이었다.

그런데 친구가 다니는 강남에 있는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가서 한 학기 빠른 단원을 배웠고, 그다음엔 1년, 그다음엔 2년이 앞서 있었다. 학원 숙제는 집에서 끝내기 벅찬 양이었기에 언제나 학교에 가지고 가 쉬는 시간마다 그 양을 감당해야 했다. 힘들었지만 그런 나를 보며 친구들은 대단하다며 우러러보기도 하고 질투하며 뒷담화를 하기도 했다. 그 시선이 처음엔 부담스러웠으나, 나중엔 썩 기분이 괜찮았다. 그리고 전엔 몰랐는데 나와 같이 몇 년씩 앞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학교 시험에서 만점을 받고 전교 등수가 아무리 올라도 학원에만 가면 나는 바닥이었다. 그게 참을 수 없이 어린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고 뒤쳐진 나는 커서 번듯한 어른이 되지 못할까 무서웠다. 그래서 그 공포만큼 무섭도록 공부했고, 그 학원에서 최상위 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뿌듯했다. 내 위에 있던 아이들이 나보다 아래 반에 있다는 것이 내 노력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선생님이 나를 불러 말했다.
“이 학원은 대치동에도 지점이 있단다. 근데 대치동에 있는 곳은 이 학원 최상위 반에서도 3명만이 갈 수 있어. 그중 한 명이 되었단다. 축하한다. 그곳에 가서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렇게 중학교 2학년이 된 나는 방학 한 달 동안 대치동에 있는 학원으로 등하교를 하게 되었다. 한 반에 거의 50명은 차 있는 것 같은 바글바글한 그곳은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라 했다. 민사고를 목표로 하고 그곳에 다니면 민사고 정도야 모두 다 갈 수 있단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꼴찌가 되었다.

그 한 달을 25년 살아온 내 인생 중 가장 열심히 산 시간이라 말한다. 이 ‘열심히’라는 것은 순전히 하루, 24시간 중 2-4시간을 제외하고 공부로 가득 채웠다는 의미다. 고등학교 3학년 그리고 재수 생활 1년 간 그때만큼만 공부했다면 못 갈 대학이 없을 텐데, 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걸 생각만으로 덮어둔 것은 그게 그만큼 괴로웠기에. 한 달간 나는 평일에 2시간 그리고 주말에 4시간 정도의 수면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밥을 먹고, 걷는 시간 내내 책을 들여다 보고 숙제를 했다. 그 당시에 학원이 밤늦게 까지 운영하면 안 된다는 새로운 법이 개정됐나 어쨌나 하여 일찍 마쳐야 했는데 , 그건 학원의 법칙을 꺾을 수 없었다. 매일매일 300개 이상의 영단어 시험을 보면서 일정 이상의 점수를 받지 못하면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자그마한 나머지 공부방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은 부모님께 늦는다 전화를 하는 시간과 화장실에 가는 시간 밖엔 허용되지 않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오전 시간이 지나 학원에 한솥 도시락이 몇십 개가 배달되면 하나씩 책상에 들고 가 치킨마요를 퍼먹으며 단어를 외웠다. (그 기억 때문인지 나는 한솥 치킨마요를 싫어한다.)

그런 시간과 수면시간을 버티게 하는 것은 순전히 정신력과 조급함 덕분이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생활 루틴을 그 사회 속 또래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수행하고 있었다. 힘들다, 못하겠다, 그만두겠다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때의 어린 나는 그랬고, 어린 그들이 그러했다. 지방에서부터 올라와 엄마와 원룸 고시원 생활을 하는 그들은 더더욱 그랬겠지. 나는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기 죽어도 싫었고, 아주, 아주, 아주 열심히 하여 중간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한 달이 끝이 났다.

최상위 반에서 함께 그곳에 간 3명 중 한 명은 거의 포기 상태로 한 달간 꼴찌 생활을 하다 민사고는커녕 외국어 고등학교 입시를 포기했다. 다른 한 명은 잘 알아주는 외고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도 그랬다. 그게 나다. 처참한 결과였다. 그 학원에 있어서는. 그 해 내가 다닌 압구정 지점에선 외고생만 줄줄이 배출했다. 나는 적어도 배우고 싶은 언어의 과로 들어가길 고집했는데 그 때문에 다니던 중학교와 학원 모두에게 받던 예쁨은 미움과 무관심으로 돌변했다. 그들이 이뻐했던 나는, 그리고 필요했던 것은 일류 고등학교의 가장 높은 경쟁률의 과 합격생이었다.

그렇게 나는 열일곱이 되었고, 그 열일곱의 나는 가고 싶던 외고와 과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즐겼다. 꽤 오랜 시간 그런 기분을 느꼈다. 마치 대학에 합격한 것 마냥 내 인생은 이제 탄탄대로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외고 생활이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안심했다. 내 손엔 어느새 아무런 풍선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생각했다. 나는 누구에게나 적당히 칭송받는 사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밖에서도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딸로 불리었다.
‘이 소속이 나를 번듯한 어른으로 만들어주겠지. 그럴 거야.’
그렇게 하늘로 떠오르기 위해 색색깔의 풍선을 모았던 어린 날의 나는 홀로 동굴 속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부라고 합니다. 지금껏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달리기를 해왔어요. 남들보다 뒤처진단 생각에 숨 가쁘게 달려왔죠. 그런데 어느 순간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앞엔 어떤 게 길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울창하고 구불구불한 숲길 뿐이었죠. 그러한 여정을 글을 통해 기록하려 합니다. 꿈을 만들어가는 시기인 학창 시절을 억압받으며 지내온 경험, 그리고 성인이 되어 대학을 졸업하고 방황했던 경험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풀어내는 글을 발행하려 합니다. 안타깝게도 저의 경험이 한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요즘 애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든요. 과거가 현재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저의 글로 하여금 용기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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