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밀러의 '칩 워-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
1945년 반도체현상부터 인텔·TSMC까지
미국 주도 '반도체 생태계'史 흥미롭게 풀어내
한국 D램 산업, 미국의 '일본 때리기'에 반사익
대만은 파운드리에 집중...유일무이 지위 획득
보조금 주며 반도체 키우는 中...기술 탈취도
'반도체=군사력' 중국에 안보 위협 느끼고
'힘' 써서라도 자국내 반도체 제조력 키우려는
美 주류의 반도체 생태계 시각·전략 읽혀
반도체 산업은 태생부터 군수산업이었다
"2020년 8월 18일, 미군 구축한 머스틴호가 대만해협 북쪽 끝으로 진입했다"라는 이 책의 첫 문장은 현재의 반도체 산업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반도체 산업 자체를 만든 미국은 여전히 세계 반도체 시장의 패권을 쥐고 있지만 날로 성장하는 중국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중심의 반도체 생태계는 TSMC로 대표되는 대만의 반도체 제조역량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요. 또 "반도체 생산이 대만에 집중되는 것은 세계 경제에 위험 요소가 되고 있다"는 저자의 판단은, 미국 주류가 반도체 산업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가려 하는지 가늠케 합니다.
그 지점을 이 책의 제목 '칩 워(chip war)'가 함축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 경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중국의 반도체 기술 발달에 따른 군사적 위협'이라는 의미를 함께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반도체는 미국 정부의 군사적 목적에 따른 지원을 바탕으로 성장했고, 첨단 무기는 최신 반도체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이 원리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이 책은 먼저 1945년 미국 뉴저지 벨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가 반도체 현상을 최초로 이론화한 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페어차일드반도체가 미국 아폴로 계획이나 군수 산업에서 산업 발판을 마련하고, 한국·일본·대만 등에 패키징 등을 맡기며 전 세계에 걸친 미국 중심 반도체 생태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다룹니다.
그리고 냉전시대 당시 소련의 반도체 산업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조소에 가깝게 평가하며 현재의 중국 반도체 산업은 소련과는 전혀 다른, 미국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음을 밝힙니다.
이 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의 역사 그 자체를 이해하는 즐거움과 △현재 반도체 생태계에서의 국가 간 구도를 이해하고 중장기적 전망을 하며 앞으로 한국의 정부, 기업, 개인으로서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궁리해 볼 수 있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반도체 산업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발전해 왔는지 그 70년의 역사는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초창기인 1945~1970년대의 이야기는 웬만한 넥플릭스 시리즈 못지않게 도파민을 분비해 냅니다.
쇼클리반도체에서 인텔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현상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윌리엄 쇼클리는 1955년 직접 '쇼클리반도체'라는 스타트업을 차립니다. 존경받는 물리학자를 넘어 부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사업가 유형은 아니었고 괴팍한 성격에 직원들도 회사를 떠납니다.
쇼클리반도체를 떠난 '8명의 배신자'들이 투자를 받아 차린 회사가 '반도체 사관학교' 페어차일드반도체입니다. 이들 중에는 훗날 인텔을 공동창립하는 반도체계의 전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도 포함돼 있습니다. 로버트 노이스는 집적회로를 공동 발명했고, 고든 무어가 기고를 통해 제시한 반도체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12~18개월마다 2배로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은 아직까지도 통용되고 있습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소련이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상에 성공한 뒤 자극받은 미국이 추진한 아폴로 달 착륙 프로젝트에 납품하며 시장에 안착합니다.
이렇게 잘 나가던 페어차일드반도체는 내분에 휩싸입니다. 페어차일드반도체의 주축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회사를 떠난 것이죠. 페어차일드반도체는 다른 복지는 좋았지만 직원들에게 스톡옵션은 절대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 같은 유능한 반도체 엔지니어가 자기 지분을 가진 회사를 세우고 싶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겁니다. 이들은 1968년 인텔을 설립합니다.
인텔은 1970년 첫 제품으로 D램을 생산했고, 1971년에는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 4004를 발매합니다. 인텔은 그 후 2000년대까지 반도체 업계의 일인자로 자리매김합니다(애플이 아이폰 계획을 발표하고 엔비디아가 자사 GPU용 소프트웨어 CUDA를 발매한 2007년 전후로 인텔의 업계 1위 지위는 흔들립니다).
포토공정·집적회로와 TSMC 모리스 창을 배출한 텍사스인스트루먼트
텍사스인스트루먼트는 반도체 산업을 일군 또 하나의 기둥입니다. 본래 석유 시추용 음파 탐지기를 제작하던 이 회사는 2차 세계대전에 미군에 잠수함용 음파 탐지 장치를 납품하며 군사용 전자 기술 회사로 확장했던 터였습니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잭 킬비는 로버트 노이스와 비슷한 시기에 집적회로를 발명했고, 이곳 연구원 제이 라스롭이 개발한 포토리소그래피 방식은 현재에도 반도체 6대 공정의 기본 원리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 관심이 모이는 것은 대만 정부의 지원으로 TSMC를 만든 장본인인 모리스 창이 이곳 출신이라는 점일 겁니다. 중국 본토에서 태어난 모리스 창은 국공 내전을 피해 홍콩을 거쳐 미국에 정착합니다. 본래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모리스 창은 중국계 이민자가 미국에서 중산층으로 살기 위해서는 엔지니어가 되는 것 밖에 길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MIT 등을 거쳐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 입사해 트랜지스터 수율을 끌어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반도체 산업은 아시아 국가들에도 성장의 발판이 됐습니다. 미국 반도체 기업들 입장으로서는 패키징 같은 후공정 작업은 인건비가 저렴한 아시아 국가에서 처리하는 것이 경영상에 도움이 됐으니까요.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에 텍사스인스트루먼트, 페어차일드 등 미국 반도체 기업들의 공장이 세워진 배경입니다.
반도체 생태계에서 발전한 아시아...일본은 너무 잘 나간 게 문제였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 반도체 분야에서 치고 나간 것은 역시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의 소니는 이미 1960년대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세계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반도체 제조업의 원조격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가 뒤늦게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소니에 밀려 철수할 정도였습니다. 1979년 출시한 워크맨은 소니를 전자산업의 정점에 올려놓은 히트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잘 나가도 너무 잘 나갔습니다.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자국의 은행들에서 저리로 융자를 받아 반도체 설비에 대거 투자하며 시장 점유율을 올렸고,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을 보호하는 무역 정책을 폈습니다. 이런 상황에 인텔은 일본 기업들에 밀려 주력 사업이었던 D램 시장에서 철수하기에 이릅니다. 1986년에는 일본의 반도체 생산량이 미국을 추월합니다. 리소그래피 부문도 니콘 등 일본 기업이 부상하면서 미국 기업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1978년 85%에서 1988년 50%가량으로 떨어집니다.
소니 회장 모리타 아키오가 1989년 출간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은 안 그래도 일본을 불안하게 바라보던 미국인들의 감정을 자극했습니다. 모리타 아키오는 "일본이 엔지니어를 가르치는 동안 미국은 변호사를 길러 내고 있다"라며 훈수를 두고 있었고, 그와 책을 함께 쓴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는 "미국의 군사력이 일본의 칩을 필요로 한다"라고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워싱턴이 육성해 온 일본의 자본가 계급이 국가주의에 침식당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돌았습니다.
일본 기업 점유율이 치솟자 그동안 '정부는 간섭하지 말라'던 실리콘벨리 기업들도 이제 정부에 손을 내밀기 시작합니다. 밥 노이스(인텔), 제리 샌더스(AMD), 찰리 스포크(내셔널세미컨덕터) 등 실리콘벨리 거물들은 일본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늘어나는데 공동 대응하고 이와 관련한 정부 로비를 하기 위해 '미국 반도체 산업협회'를 설립합니다.
이에 미국 정부도 움직입니다. 미국은 1986년 일본과 '협의'해 D랩 칩 수출 쿼터를 설정하도록 합니다. 이듬해에는 주요 반도체 기업과 국방부는 절반씩 자금을 제공해 세마테크라는 컨소시엄도 결성합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에서 삼성전자와 같은 반도체 기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산업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실리콘기업들이 일본을 견제한 데 따른 반사이익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적의 적은 친구니까요. 실제로 1998년에는 한국 기업이 일본을 제치고 D램의 최대 생산자 자리를 차지합니다.
대만은 일본과 달랐다...미국과 경쟁하지 않는 파운드리에 집중
결과적으로 대만은 일본보다 더 기민하게 대응했습니다. 반도체 생태계의 유일무이한 지위를 차지하면서도 미국의 견제를 받지 않는, 파운드리라는 영역에 특화했으니까요.
대만 정부는 이미 1960년대부터 의도적으로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안으로 비집어 들어갔습니다. 미국 반도체 기업의 공장을 유치하면 자국민에 좋은 제조업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을뿐더러, 미국과의 관계를 통해 안보 능력도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1985년 모리스 창을 불러 대만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합니다. 대만 정부는 그에게 대만공업기술연구원 원장을 주며 "무슨 일을 하든 간섭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합니다. 몇 해전 텍사스인스트루먼트를 떠났던 모리스 창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제공된 것입니다.
모리스 창은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구상하던 새로운 종류의 사업, 고객이 설계한 칩을 생산해 주는 반도체 회사 '펩리스' 기업 설립을 추진합니다. 설립 자금은 대만 정부가 48%, 네덜란드 반도체 기업 필립스가 27.5% 등을 출자해 TSMC가 설립됩니다.
이처럼 저자는 오늘날의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를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반도체 패권국인 미국의 주류가 앞으로 어떻게 이 생태계를 끌고 가려는지 방향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중국 반도체 산업을 때리는 이유
저자는 짐짓 아닌 척 하지만, 미국 대중 강경론자의 시각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과 취임, 미국 내 정책 결정은 보면 그 '대중 강경론자'들이 이제는 미국의 주류가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추정한 미국 주류의 시각은 이렇습니다.
"미국이 만들고 전 세계와 협력해 이룬 반도체 생태계가 지금 중국에 의해 위협받고 있어. 게다가 반도체 기술은 군사력과 직결돼 있어. 그런데 지금까지 미국 정부는 '자유무역이 좋은 것이여'라며 안일하게 대응해 왔어. 중국이 자국 반도체 기업에 엄청난 보조금을 주며 전략적으로 반도체 산업을 키우고 있는데 말이야. 중국 기업들은 미국 기술을 훔치고 있을 뿐 아니라, 화웨이 등 중국 기업들의 반도체 산업 증대는 미국에 실존적 군사적 위협이 되고 있잖아. 게다가 현재 첨단 반도체 제조를 독점하다시피 하는 TSMC가 있는 대만은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너무 취약해.
그나마 다행인 건 미국은 반도체 생태계에서 주요 거점을 다 잡고 있다는 점이야. 그렇다면 아직 남아 있는 미국의 힘을 활용해 TSMC, 삼성 등 반도체 제조기업들에 미국 내 최첨단 설비를 구축하라고 해서 미국 내 제조 역량을 확보하는 게 맞지 않아?"
이 책은 미국 주도의 전 세계적(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반도체 생태계 설립의 역사를 보여주고, 군사·산업 측면에서 중국을 중대한 위협으로 보는 미국의 시각을 드러냅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기업이, 개인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