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저널리스트 에드 콘웨이의 '물질의 세계'
모래, 소금, 강철, 구리, 석유, 리튬
채굴부터 가공, 유통까지 단계를
르포로 풀어낸 현대 문명의 대서사시
500쪽 가득한 물질세계 정보 압도적
독일 유리산업 발전 뒤엔 괴테의 진흥정책
구겐하임, 구리 광산 팔아 질산염 투자 대실패
루브르박물관 피라미드는 퐁텐블로 모래로
인근 지역 광물로 만든 콘크리트, 지역색 강해
인공지능(AI)과 고대역폭메모리반도체(HBM)는 전자통신 강국 대한민국에 사는 일반인들이 매일 같이 주식시장이나 뉴스에서 접하는 아이템입니다. 반도체 6대 공정도 이젠 상식의 영역에 들어섰는데요. 반도체 업계에서는 일반인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런 식의 설명을 내놓곤 합니다.
"최첨단 아이템인 반도체는 실은 주변에서 보기 쉬운 모래로 만들어집니다. 규소(실리콘)를 통해 만들어진 '잉곳'에서부터 반도체 제조가 시작되죠. 규소는 반도체 성질을 지닌 데다 지구에서 흔한 물질이라 반도체칩을 만들기 적당합니다."
하지만 영국의 저널리스트 에드 콘웨이는 '물질의 세계'에서 이 같은 '상식'이 절반은 틀렸음을 지적합니다. 반도체의 주 재료가 규소인 것은 맞지만,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규소는 모래가 아닌 석영암을 통해 얻기 때문입니다.
실리콘메탈 제조 과정에서 석영암에서 산소를 제거해 용해된 실리콘은 1800도 용광로 바닥에 가라앉고 작은 주둥이를 통해 밑으로 빠져나옵니다. 이 과정에서 모래를 사용하면 모래가 필터를 통해 빠져나가기 때문에 용해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먹 크기의 석영 덩어리가 필요하다는 게 독일 학자 라이너 하우스의 설명입니다.
결국 모래나 석영암이나 기본적인 화학 구조는 같은 규소지만, 그 크기 때문에 모래가 아닌 석영암이 실리콘 원료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모래, 소금, 강철, 구리, 석유, 리튬 등 6가지 물질을 현대 사회의 기반이라고 정의하고, 이들이 세계 어느 광산 등에서 채굴돼 어떤 식으로 처리돼 우리 삶을 지탱하는지 르포를 통한 대서사시로 풀어냅니다. 500페이지를 훌쩍 넘는 분량의 책에는 이들 물질세계에 대한 정보가 빈틈없이 꽉 차 있습니다. 일단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숨 막히게 많은 정보들을 나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들 정보들을 꿰어 하나의 메시지를 내놓습니다. 바로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것이죠.
저자는 스스로도 자신을 그동안 비물질의 세계, 관념의 세계에서만 살아온 인간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과 마찬가지로요. 지금의 한국 사람들도 매일 같이 AI에 대해, 또 계엄령과 관련해 헌법에 대해 논하지만, 우리 일상을 지탱하는 물질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요.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저자도 대부분의 인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류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그리기 위해서는 이들 물질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관념뿐 아니라 이들 물질의 속성과 매장량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인류가 언젠가는 재생 에너지로 모든 에너지원을 대체하고, 강철과 구리 등 필요한 대부분의 광물을 광산 채굴이 아닌 재활용을 통해 얻는 '지속가능한 미래'에 도달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선 전례 없이 많은 광물들이 채굴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가령 인류 전체가 이용할 만큼 충분한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태양광 패널이 설치돼야 하는데 그 패널을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석영암이 채굴돼 엄청난 에너지를 들여 가공돼야 합니다.
관념의 세계에 속한 독자들로 하여금 6가지 물질에 대한 막대한 정보를 던지는 동시에, 우리의 '지속가능한 미래'를 실현하는데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질문을 던지는 책 '물질의 세계'였습니다.
#간단하게 덧붙이는 메모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유명한 광산 재벌 구겐하임 가문. 그러나 대니얼 구겐하임은 20세기 초 '희대의 도박'을 해 대실패 한다. 비료의 원료가 되는 질산염에 미래를 걸고 칠레 칼리치 질산염 광산에 투자하면서 칠레 추키카마타 구리 채굴권을 매각한 것. 하지만 얼마 후 독일에서 공기 중에 있는 질소를 고정시키는 '하버-보슈 공법'이 개발되면서 질산염 가격은 똥값이 된다. 반면 구리는 전자통신 발달로 수요가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칼 자이스를 비롯해 독일이 유리 산업의 강자로 등극한 데에 그 유명한 시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주도한 유리 제조 진흥 정책이 있었다. 산업혁명 후발 주자였던 독일은 당시 첨단산업인 유리제조업에 재정을 지원하고 주문량도 보장해 줬다. 반면 유리 산업에 훨씬 발달했던 영국은 창문세는 물론 일반 유리 완제품에도 높은 세금을 부과해 갈수록 경쟁력이 떨어졌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최첨단 군수품인 쌍안경의 대부분이 독일산 렌즈로 만들어졌었고 독일이 수출을 중단한 터라, 영국은 수상이 일반 가정에 '쌍안경, 망원경을 기부해 달라'는 호소문을 낼 정도였다.
-유리나 콘크리트 같은 공산품에도 각 지역의 특색이 담겨 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는 품질 좋기로 유명한 파리 퐁텐블로숲의 모래로 만들어졌다. 콘크리트는 특성상 타설 되는 지역의 석회암과 모래, 자갈이 사용된다. "맨체스터의 콘크리트 덩어리에 손을 대면 피크 지구의 자갈과 바위를 만드는 셈이 된다. 뉴욕의 콘크리트는 롱아일랜드섬 자메이카만의 모래에서 태어났다". 콘크리트는 타설 뒤 지금도 꾸준히 내부 화학작용이 이뤄지는 '살아있는' 소재다.
-파키스탄의 케우사 소금 광산에서 채굴되는 소금은 '히말라야 핑크솔트'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팔린다. 하지만 케우사 소금 광산은 실제로는 히말라야산맥 기슭에서 322km나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다.
-프랑스 파리의 상징 에펠탑은 강철이 아닌 연철로 만들어졌다. 에펠탑을 설계한 귀스타프 에펠이 개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강철에 의구심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 에펠탑은 강철로 만들어졌다면 에펠탑에 들어간 연철의 6분의 1 정도의 강철만 사용할 수 있었다. 타이태닉호는 강철로 만들어졌지만, 해당 강철은 지금 기준으로는 절대 통과할 수 없는 조약 한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