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아닌 다섯이서 하는 여행
낭만이 가득하던 제주도
그 시절 제주는 낭만이 가득했다. 올레길이 널리 알려지고 저가항공들도 생겨나며 너도나도 제주도의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걸어보겠다며 왔더랬다. 나와 나의 연인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에 부모님과 가본 제주도는 그저 따뜻한 섬일 뿐이었는데, 대체 무엇이 그리 멋지다는 건지 궁금해서 일주여행을 떠났다.
사실 그 당시에도, 여행을 다니는 동안에는 잘 몰랐다.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긴 했지만, 이 정도 자연은 “육지”에도 많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다녀온 후 시간이 흐를수록 뇌리에 더욱 선명히 남던 그 녹음, 햇살, 바다색과 흙의 느낌! 사진 속의 우리는 기억 속 모습보다 더 즐거워 보였다.
일 년에도 여러 번, 매년 오게 될 줄 알았던 제주도는 그렇게 우리의 추억 안쪽으로 점점 더 깊숙이 자리를 옮겼다. 함께 걸었던 거문오름과 송악산 둘레길, 성산일출봉도. 우도와 김녕, 함덕의 아름다운 바다와 비밀스럽던 곶자왈의 숲도 모두 오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아이와 다시 찾은 제주도
그 여행으로부터 정확히 10년이 지났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제주도를 다시 찾으려니 긴장이 되어 사전조사를 시작했지만, 조금 조사하다가 깨달았다. 제주도는 그때보다도 갈 곳이 많아졌으니 어디에 가야할지 찾아낼 필요가 없다는 걸 말이다. 오히려 고르기가 힘들 정도였다.
젊은 두 연인이 함께 할 때와 초보 부모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떠날 때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분명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여행인데,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둘이서 갔던 곳들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건강한 청년들이 다니던 곳에 미취학 어린이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였기에 행선지를 대폭 수정했다. 트레킹과 드라이브는 버리고, 호캉스와 물놀이, 체험활동들로 가득 채웠다. 함께 걸으며 날것의 자연을 만끽하는 게 아니라, 이동거리를 최소화하면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활동들을 즐기게 되었다.
소중한 이들이 즐거운 여행
내가 아니라 ‘내 소중한 이들이 즐거운 여행’
-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그런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우리에게 걷는 여행이 아니라 ‘머무는 여행’을 하게 만들었다. 해변에서 숙소 내 동물사육장(먹이주기체험)으로 아침산책 장소를 옮겼고, 경치 좋은 카페 대신 목장 또는 농장으로, 자연 속을 걷는 트레킹 대신 실내에서 노는 테마파크로 바꾸었다.
이동 동선도 줄이고 울타리 안으로 장소를 옮겼음에도 체력소모는 더 커졌다. 어느 곳에서 가든 마음 편하게 경치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면밀히 시선을 옮기며 노심초사 지켜봐야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어른인 내가 전혀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아이일 때만 해도 부모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다니는 일이 요즘처럼 흔하지 않았다. 방학 두 번만 챙겨도 꽤 잘 챙기는 편이었고, 여행의 기간이나 이동거리도 지금보다는 매우 짧은 편이었다. 근로시간도 임금 수준도, 심지어 교통망조차도 지금과는 달랐던 시기이니 부모님 탓은 아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내가 하고 싶었던 만큼의 충분한 활동과 여행을 즐기지 못한 것은 사실인 것이다. 때문에 지금에 와서, 어른이 된 채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활동을 함께 하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날 때면 내 마음속 어린아이도 함께 즐거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위로받고 치유되는 기분이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마음속 빈 공간이 채워진다.
특권이자 자부심
아침저녁으로는 별을 보며 선선한 공기로 호흡하고, 한낮에는 햇살을 한가득 느낄 수 있던 9월 말의 제주도는, 우리 가족의 마음속에도 따스함과 반짝임을 듬뿍 채워주었다.
오름 하나 못 올라 보고, 해안가 카페 방문 한 번 못했어도, 행복의 기억은 예전보다 더욱 크게 자리했다. 결국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 인 것이니, 둘일 때보다 다섯일 때가 훨씬 충만하다.
내가 아니라 나의 소중한 이가 좋아하는 활동을 해도, 나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그들에게 그런 경험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 나의 능력이자 특권이고, 또 보람이자 자부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특권을 최대한 자주,
그리고 가능한 한 오래도록 누릴 계획이다.
(25.9.30.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