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산

오래 묵히지 않겠다는 결심

by 란님


장태산을 처음 알게 된 건 3년 전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사진을 통해서였다. 빨갛게 물든 침엽수로 울창한 숲 가운데 새하얀 현수교가 길을 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설명하길 메타세쿼이아의 붉은 단풍이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하여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저곳 다녀봤어도 비슷한 풍경을 본 기억이 나지 않다.


그 후로 장태산은 3년 동안 나의 여행 버킷리스트였다. 어디서나 가깝지만 애매하게 먼 대전의 지리적 특성상, 가을이면 늘 후순위로 밀려 가보질 못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간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말이다. 올해도 방문을 어렵게 만드는 여러 사정들이 있었다. 핑곗거리를 제공하며, 단풍은 내년에도 오니까 한 번 더 포기해도 괜찮다고 속삭였다.


아직 방문해보지 못한 명소가 많은 것은 기대감을 주지만, 가봐야겠다 정한 곳에 체크 마크를 남기지 못하는 것은 실망감을 키운다. 오래 끌수록 무게가 쌓이고 무거운 추가 되어 발목을 잡는다. 더 커지면 가라앉을 것 같아, 발을 구르기 위해 올해는 무작정 가보기로 했다.

생각은 움직임을 멈추게 하니까 움직이기 위해 생각을 멈췄다. 계획과 준비 없이 출발한 여행이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일단은 내가 본 사진의 출처라는 "전망대"에 가보기로 했다.




오늘의 동반자는 5살이었고, 아이가 집중력을 잃기 전에 일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나는 말눈가리개를 하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한눈팔지 않고 전망대 표시만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SNS 유명세를 타는 고가 산책로도 중에 보기로 하고 오로지 전망대에 오르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



아이는 부모의 불안을 재빠르게 감지하고 흡수한다. 조금이라도 불안을 내비치면 나를 믿고 따라오는 아이는 배로 불안해한다. 앞서가던 사람의 수가 조금씩 적어지다 영(0)에 수렴했을 때, 몹시 당황했지만 두리번거리지 않고 전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알아챘는지 가기 싫다고 찡찡거리는 아이의 입에 주머니 속 곰돌이 젤리를 넣어준다. 아이 이런 작은 제스처에도 용기력이 크게 충전된다.


조치가 필요한 건 아이가 아닌 부모다. 부모가 의연해지면 아이의 불안은 자연히 진정된다. 빠르게 돌파하기로 마음먹고 아이의 손을 꼭 잡은 다음 발가락에 힘을 실어 집중해서 걷는다. 가파르고 좁은 길을 오르다 보니 그제야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 길을 잘못 들었구나.

여긴 산책로가 아니라 등산로였구나!'


등산스틱과 배낭, 모자까지 갖춘 등산복을 입고 간식 드시는 분들의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운동화만 달랑 챙겨 신고 온 우리도 곁에 앉아 젤리를 먹으며 상황을 되짚어 본다.


전망대까지 0.8km, 지나온 길은 0.3km - 수치만 보면 돌아가는 것도 괜찮아 보이지만, 한 봉우리의 정상까지 거리가 300미터 거리였다는 건 거의 직선거리로 능선을 타고 왔다는 말이다. 탈길은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하다. 길이 좁아 둘이 나란히 서기 힘드니 아이를 잡아주기도 힘들다. 결국 계속 가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아이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재미난 상황인 척 선글라스를 씌워주고 멋있다며 추켜세운다.



행히 이후로는 길이 넓어지며 아이와 발맞추어 걸을 수 있었기에 우리의 불안도 잦아들었다. 계단을 내려와 앙상한 나무가 우거진 숲을 지나며 밟는 흙의 감촉이 푹신하게 느껴져 안심이 되었다. 자연 속 산책은 마음을 빗질하여 다듬어 준다.


누군가의 염원이 담긴 소원돌탑과 오랜 세월을 담은 팔층석탑, 여러 사람을 담아 함께 앉히기 좋아 보이는 너른 바위처럼 다양한 돌들을 보는 동안, 표지판이 말하는 전망대까지의 거리는 0.8km에서 0.4km로, 또 0.3km로 점점 줄어들었다. 거의 다 왔다 조금만 힘내자 길을 오르니 정자가 하나 보인다. 계단을 올라 숨을 고르며 경치를 감상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이 고요하다. 울긋불긋 가을색으로 물든 완만한 곡선의 봉우리들 사이에는 높고 푸른 하늘을 그대로 담은 저수지가 있다. 긴장했던 두 눈과 머리가 편안해진다.




무리 멋져도 내가 찾던 풍경은 아니기에 다시 방향을 살핀다. 산에 많이 다신 것 같은 분들께 여쭤보니 이 정자가 바로 전망대라고 한다. 현판을 보니 '장태루'라고 적혀있다. 아까 지나친 표지판에서 전망대와 장태루가 병기되어 있던 기억이 난다.


그럼 내가 본 사진의 풍경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혼란스럽다. '형제바위'가 사진 명소이니 가보라고 하신다. 어차피 정상까지 올라온 이상 이젠 내려가는 길 뿐이다. 다시 걸음을 재촉해 본다.

사이좋게 솟아올라 산세를 바라보는 형제바위는 둘 사이에 앉을 곳도 마련해 두어 지나던 사람들이 머무르게 만든다. 사진 명소도 맞고, 내가 찾던 붉은 메타세콰이아 단풍도 맞지만 이질감이 든다. 저 멀리 작게 보이는 '숲속어드벤처'를 보니 확실히 알겠다. 여기가 아니다! 아무래도 SNS 핫플레이스인 전망대와 장태산 전망대는 다른 곳이었나 보다.




목적지를 잘못 설정하였단 걸 깨달았어도 경로를 재탐색할 수는 없다. 오전에 엄마가 원하는 산에 가면 오후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곳에 가기로 약속했고, 장태산 입구부터 이곳까지 오르는데 1시간 30분이 걸렸다. 산을 내려가 도심까지 나가면 점심 먹을 시간도 부족할 참이었다.


뜻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어쨌든 단풍이 절정인 시기에 장태산에 왔으니 버킷리스트 하나는 클리어다. 그냥 오기만 한 게 아니라 정상에 올랐다. 살면서 "등산"을 한 경험을 손에 꼽을 정도이니 산린이 축에도 못 끼는 내가, 아이지 데리고 운동화 정상에 다녀왔다는 게 묘한 성취감을 주었다. 아마도 자기 발로 걸어온 5세 아이들 중엔 우리 아이가 장태산 등산은 가장 많이 하지 않았을까. 나 자신도 뿌듯하지만 아이가 더 자랑스러웠다.

정상에 가겠다는 사람에게 장태산은 딱 본론만 얘기한다. 이리 두르고 저리 돌리지 않고, 최단거리로 쭉 질러 올라갔다 내려온다. 덕분에 다리에 긴장이 많이 되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올라갈 때는 1시간 30분이 소요됐지만 내려올 때는 30분만 걸렸다. 아낀 시간만큼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다 오후 일정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붉게 물든 장태산의 가을 풍경은 아이와 나에게 오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아줄 것이다.












붉은 색으로 덧칠한 부분이 우리가 다녀온 코스였다. (SNS 핫플 코스는 지도 가장 아래 보이는 녹색 선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