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는 펜과 종이가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을 그려대고, 말보다는 그림으로 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보니 어린 시절의 나와 많이 닮았다. 그런 이유로 아이가 그린 그림일기 및 설명서, 독서 감상문 같은 종잇조각들이 집안 여기저기에는 수북이 쌓여있어도 왠만하면 별 잔소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쓰레기 같아 보여 모르고 버렸다가 집안이 발칵 뒤집힐 때도 있었는데 중요한 것은 네가 알아서 잘 정리 해 두는 것이 우선이라고 아무리 아이를 타일러도 그림을 여기저기에 널브려 놓는 아이의 습관은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책 한 권을 읽다 말고 뭔가 자신이 떠오른 것이 있었는지 식탁에 앉아 한참을 뭔가를 쓰고 그리기 시작했다. 빨래를 개며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던 차에 갑자기 큰 소리가 났다. 아이가 자신이 그린 그림 종이를 있는 힘껏 구겨대는 것도 모자라 찢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워 놀란 나는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유를 물었다.
" 마음에 안 들어. 내가 그린 게 마음에 안 든다고."
다른 식구가 자신의 그림을 혹시라도 구기거나 버리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서 이건 무슨 경운가 싶어 할 말을 잃었다. 그린 그림을 잘 정리하지 않는 습관도 마음대로 그려지지 않는다고 이렇게 마구 구겨버리는 것도 아이가 자신의 그림을 스스로 아끼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기어이 내 입에서는 한숨이 나오고야 말았다. 나는 그동안 모아 두었던 아이의 그림 뭉치들을 찾아 들고 아이 앞에 내밀었다.
“이건 네가 작년에 그린 그림이야. 저건 올봄에 그린 그림이고. 봐봐. 여기 선 쓰는 게 훨씬 나아졌지? 이거 보다 지금 네가 구겨버린 그림도 비교해보면 진짜 많이 나아졌어. 네가 확인해봐.”
증거를 들이밀자 아이는 그제야 꽉 쥐고 있던 주먹의 힘을 풀기 시작했다.
그림 초보자들도 가끔 자신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혹시라도 누가 볼까 싶어 꼭꼭 숨기거나 감출 때가 있다. 아마도 아직 누구 앞에 당당히 보여줄 실력은 되지 않는다는 부끄러움에 그런 마음이 클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그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누가 봐도 부족해 보이는 이 순간을 인정하고 그 그림들을 절대 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사진첩처럼 나만의 그림책을 앨범이나 파일에 꾸준히 모아 보는 것은 더 좋다. 그러면 어느 날 나의 그림이 이렇게 나아졌나 싶은 날이 분명히 온다. 꾸준히 그 기간을 버틴 선물 같은 나만의 그림 파일이다. 어찌 되었든 내가 그린 그림이고 그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행복했던 순간의 기록인데 내가 아끼지 않으면 그 누가 그것을 아껴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