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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쥬 Apr 29. 2018

외항사 퇴사 후 6개월 경과

3년을 함께 한 에미레이트를 떠나며

 에미레이트로부터 애타게 기다려온 골든콜이 울리던 순간을 기억한다. 회사에 있었고, 범상치 않은 발신번호를 보고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전화를 받았다. 그때의 심장이 터질듯한 기쁨. 그런데 참 재미있게도 한숨 고른 한편으론 마음이 그리 편치 않았다. 지금 이 잡 오퍼를 받는다면 향후 인생을 어떻게 계획할까에 대한 현실적인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외항사 승무원이라는 직업이 장기적인 커리어가 될 수 있을까?"

 "현지(아랍에미리트 두바이)가 베이스인 외항사 승무원 생활을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이 아니라면 얼마나 있다 와야 다시 돌아와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당시의 나는 회사생활을 1년 반 정도밖에 하지 않은 새파란 직장인이었다. 그간 해온 업무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전문성을 키우고 향후 추가적인 업무 역량을 늘리거나 이직을 하는데에 관심이 깊던 차였다. 지금 이것을 놓고 승무원의 길로 나아간다면 고작 1년 반의 경력은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승무원 도전에 연거푸 떨어질 때마다 아쉬워했던 내가 이제는 현실 사회인이 되어 골든콜을 받아 든 것이었다. 그보다 2년 전 한창 도전하던 때였다면 아마 고민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제는 잠깐 즐기다 돌아오면 된다고 말하기엔 꽤 무거운 나이다. 언제쯤 돌아올 계획을 세워야 할까, 돌아온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두바이 베이스 생활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모든 선택에는 얻고 잃는 것이 있다. 얻는 것이 좀 더 크다고 판단되면 움직이면 된다. 세상을 무대로 비행하고, 전 세계에서 온 다국적 동료들과 일하는 기회는 아마 쉽게 오지 않을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아쉬움은 남을 것이기에 이왕이면 비슷비슷한 길에서 벗어나 가보지 않은 길을 가기로 했다. 적어도 못 가본 후회는 없을 테니. 다만 3년이라는 시간을 제한했다. 최대 3년. 다음 스텝을 밟겠다고. 그랬기에 3년간 열심히 비행했고, 최대로 즐기려 노력함과 동시에 저축, 공부 등의 준비를 하여 지금은 미국에 와 있게 된 것이다.


 에미레이트를 떠난 지 6개월이 지났다. 지금쯤이면 객관화가 되었을까. 이제는 그립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은 에미레이트.


 에미레이트에서의 3년은 정말 화려하고 멋졌다. 기대했던 만큼 전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녔고, 다국적 동료들과 즐겁게 웃으며 일했다. 개인적으로 비행 자체에서의 어려움은 0에 수렴했다. 수평적 조직이기에 위계질서에서 오는 피곤함도 없었다. 비행할 때만큼은 늘 즐거웠다. 운이 따라 1년 만에 이코노미에서 비즈니스 크루로 승진도 빨랐다. 매번 함께하는 승객들도, 동료들도 바뀌기 때문에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새로웠다. 다소 힘든 비행을 하더라도 비행기에서 내리면 즉시 모두 지나간 일이 됐으니 세상 편했다. 크루들의 프로파일도 다양했다. 심지어 변호사, 의사, 아티스트인데 경험을 쌓으러 온 친구들도 많았다. 급여도 나쁘지 않았고 도착지마다 호텔과 체류비가 제공되었다. 레이오버를 즐기고 맛있는 것을 먹고 마지막엔 장을 봐서 두바이로 돌아왔다. 회사에서 숙소를 제공하고 유틸리티도 커버되었으며 숙소와 아파트를 오가는 셔틀버스가 있어 아무런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환경이었다. 비행 사이사이 쉬는 날들도 상당하다.


 반면 나는 이 생활을 피터팬의 삶이라고도 불렀다. 랄랄라 흔한 어른들의 걱정 없는(듯한) 꿈 같은 생활을 하려면 가능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비행 스케줄만 따라다니면 세상 걱정할 것이 없었다. 배 부르고 등 따시니 세상이 아름다워야 할 텐데 이상하게 외롭고 무료했다. 비행하고 돌아다니며 북적북적 지내다가도 숙소에 오면 혼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승무원만 2만 명이 넘어가는 에미레이트에서 동료들이 매번 바뀌어 같은 사람과 두 번 이상 비행하기도 어려운 환경이니 깊은 인간관계를 맺기 어려웠다. 게다가 20, 30대가 대다수이다 보니 오히려 스펙트럼이 좁게 느껴졌다. 퍼서(사무장)나 CSV(Cabin SuperVisor:부사무장)처럼 오래 근무한 직급 있는 사람들롤모델로 삼기에 내 성에 차지 않았다. 다국적 동료들과 승객들이랑 어울리면 견문이 넓어질줄 알았건만 되려 이 나라 사람은 이렇고, 저 나라 사람은 저렇다는 편견에 갇혀 오히려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어가는 나를 발견했다. 가장 큰 혜택이라 여겼던 여행의 즐거움도 누그러져 갔다. 어느 순간부터 예컨대 유럽도 내겐 다 비슷비슷한 유럽 도시들처럼 느껴지는 등 여행지가 특징별로 비슷비슷하게 묶였다.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감흥이 없게 되었고, 누리는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도 사라져 갔다. 밤낮 패턴이 어그러져 쉬는 날이 아무리 많아도 자다가 날려버리곤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잠을 잘 수 있는지, 이토록 게으를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무엇보다 향후 계획에 대한 마침표를 찍지 못해 마음의 짐을 안고 있던 중반부에는, 계속해서 불안한 상태였다. 피터팬처럼 계속 사는게 결코 나쁜 것이 아닌데도 나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꿈꾼답시고 고뇌를 잔뜩 했다. 그렇게 갈 길을 한 번 크게 잃었다가, 끝을 재차 결심한 후, 오히려 마지막까지 비행을 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정말 꿈 같다. 젊은 날, 꼭 한 번 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직업이다. 다만, 본인의 성향이 승무원의 라이프스타일과 적합한지 반드시 묻고, 평생 커리어로 삼을 것인지, 아니라면 계획을 분명히 세운 채 접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물론 이 직업이 잘 맞고 오랫동안 외항사 승무원 생활을 멋지게 해나가는 분들도 많으시다. 만약 내가 두바이를 정착의 도시로 삼을 수 있었다면 승무원 생활을 계속 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인 선배들이랑 비행할 때 자주 듣던 말이 두 가지, '직장생활 하다 왔으면 이 생활이 얼마나 좋은지 알죠?'라고 묻고 그런 경우에는 오래들 일한다고들 하는 것이 하나, 다른 하나는 '그런데 만약 다른 꿈이 있으면 빨리 떠나요, 아니면 자의반 타의반으로 오래 있게 되거든. 시간이 정말 금방 가.'였다.


 다시 험난한 세상에 뛰어들어 온몸으로 차다 덥다 하는 삶을 재차 살아가면서 그저 안락하기만 했던 에미레이트에서의 시간들은 되새김질해볼 만한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가끔 현실이 너무 팍팍하게 느껴질 때면, 왜 그토록 아늑했던 컴포트 존을 빠져나왔는지 묻게될 때도 있다. 하지만 언젠가 떠나야만 한다면, 그곳에서 30대를 맞은 내가, 40대도 그곳에서 맞이할 결심이 아니라면.. 떠나야만 다. 오히려 가장 아름다울 때 돌아섰기에 그 추억이 더 빛나게 남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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