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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쥬 Sep 24. 2018

외항사 승무원에게 여행이란

모두에게 다른 모양으로 남아야 할 여행

 위시리스트나 버킷리스트라 부를 만한 거창한 목표는 없었지만, 3년 동안 가고 싶은 도시들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했다. 클림트를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 정작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려웠는데 비엔나를 여러 번 가면서 나의 말은 영혼을 되찾았고, 케이프타운의 테이블마운틴을 오르면서 낯선 아프리카 대륙을 다시 보게 되었고, 바티칸에서 느낀 신성함과 감동은 투어를 두 번이나 했음에도 도리어 가중되는 것이었고, 제네바의 UN 건물 앞에 앉아 한때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 했던 나를 추억하였고, 뜬금없이 내린 미얀마 양곤에서 미지의 땅이 꿈틀대는 인상을 받았고, 첸나이에서 해피무브 봉사활동을 했던 기억을 겹쳐 보았고, 엉뚱하게 시드니와 오클랜드에서 한국을 추억했고, 캘리포니아 하이웨이 넘버원을 달리며 가슴이 뻥 뚫리는 자유를 느꼈으며, 방콕이나 홍콩, 싱가포르는 자주 다니며 친근해 옆집처럼 느껴졌었다.



 남들 하는 것처럼 하고 싶었던


 처음에는 남들 하는 것처럼 다 하고 싶었다. 생전 처음 가 보는 그 모든 곳에 대해 신이 났다. 일단 교과서적인 접근을 했다. 비행 일정이 나오면, 해당 도시에서 꼭 가야 할 곳, 해야 할 것, 맛집들을 찾아가며 바삐 다니곤 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속칭 인증샷을 많이도 남겼고, SNS에 공유하기도 했다. 어느 날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왜 이 사진들을 공유하는가? 검색해 보면 쏟아지는 수많은 똑같은 사진들, 그 풍경은 아무리 카메라에 담아도 눈에 담은 것만 하지 못한데. 개인적으로는 경험을 보존하고 느낀 감동을 전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그 분위기와 나의 감정 등은 내 안에 머무는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다. 그러면서 더 이상 돌아다니는 일상들을 공유하지 않게 되었다.


 쇼핑리스트 등을 검색하여 사다 놓은 것들은 입으로 사라지는 것이거나 그저 예쁜 쓰레기인 것들이 많았다. 많은 크루들이 여러 도시를 다니며 개인적인 수집품, 예컨대, 냉장고 자석이나 스타벅스 시티 머그 등을 모으는 것을 보았다. 처음 크루 숙소에 입주해 아이리쉬 룸메이트를 만났는데, 그녀는 비행을 한 지 만으로 9년을 넘긴 상태였다. 숙소 냉장고 가득 붙어 있던 정신없는 자석과 주방 선반을 가득 채운 스타벅스 시티 머그에 먼지가 내린 모습을 보아서인지 그쪽으로는 관심을 두지 못했다. 24시간 혹은 48시간 여를 머물며 스쳐 지나가면서 그 장소를 기억하기 위한 수집이 괜스레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나마 종종 엽서를 사고, 누군가에게 부치는 일을 아주 가뭄에 콩 나듯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좀 더 많이 쓸걸 하는 후회가 남는다.


 어느 날은 폴란드 바르샤바(Warsaw, Poland)에 비행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행 가는 도시들이 다 새로운 곳들이라 늘 가기 전에 열심히 그 도시에 대해 알아보곤 했는데, 바르샤바 전에는 무슨 바쁜 일이 있었는지 그렇게 하지 못했었다. 도착 후, 비행한 동료들 중 한 명과 마음이 맞아 시내에 나갔다. 웅장한 건물 앞에서 사진도 찍고, 다른 유럽 도시들보다도 물가가 유난히 싼 덕에 두 손 가득히 돌아왔다. 그야말로 즐겁고 좋았다. 두바이로 돌아와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있던 도중,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서 우연찮게 폴란드 바르샤바 편을 다뤘길래 보게 되었다. 멋지다며 찍었던 그 건물이 말로만 듣던 '문화과학궁전'이었다. 어찌나 부끄럽던지. 심지어 쇼팽이 영문으로 쓰면 Chopin이라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스스로에게 매우 실망스러웠다. 몸은 이곳저곳 떠도는데 내 머리와 가슴은 미처 따르지 못하는구나. 물론 비행을 다니면서 매번 무언가 알아야 하고,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비행을 하면 할수록, 잠과 휴식의 중요성이 무엇보다 높아지는 만큼 두뇌가 점점 쓸모 없어지는 것 같아 슬펐는데, 확인 사살받는 것 같았달까.


 덧없어진 역마살


 TV 어느 프로그램에서 어느 지역을 소개하면 그 지역이 유난히 붐비고, 옆집 누구가 간 곳은 나도 가봐야 되는 그런 심리가 아무래도 있지 않은가. 나 역시도 주변인들이 여기저기 여행 다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던 사람이었다. 그게 어쩌면 승무원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큰 동기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세상이 너무너무 궁금해서 말이다. 역마살이 있는 것 같다며(그건 사실인 것 같지만) 어떻게든 국경 밖으로 튀어나가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다. 그런데 그런 심리 때문이었을까. 외항사 승무원으로서 접하는 세계는 너무 쉽게, 너무 빠르게, 급히 맛만 보며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한 숟갈 고작 퍼먹고는 뭐라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깊숙이 들여다볼 기회는 잃었기 때문에, 여행의 산업적 측면에서 부정적인 면면들만 들여다 보였다. 여행도 하나의 산업 축이다. 누군가는 이를 통해 돈을 벌어야 한다. 승무원도 어쩌면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혜택을 보는 직업군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비슷비슷한 동네(?)끼리 묶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관광 자원을 잘 상품화하여 내놓는데 서로가 아무래도 벤치마킹을 하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기대가 비슷한 것인지 어딘지 유사한 구석들이 있다. 그런 와중에 스스로 차이를 만들어 내려면 내 지식이 성장하고, 여행의 목적 자체가 그 지역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자 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사실 그렇게까지 준비되기가 쉽지 않고, 크루로서 돌아다니는 것으론 매우 제한적이다.


 글쎄, 여행이 뭐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유난히 주변을 보면 여행을 모두 같은 모양으로 소비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주변 크루들의 인스타그램 등을 보면 어디서 찍었는지 알 것 같은 뻔한 모습들을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나는 프레임 밖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문득 허망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그 순간에 몰입하여 내 맞은편 사람과의 시간에 충실하고,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는 것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시종일관 카메라의 사각 프레임에 투영되는 모습에 신경 쓰는 것이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면서 점점 더 많은 것에 흥미를 잃어갔다. 비행하며 가던 데 또 가고 또 가기도 하고, 그렇게 모든 게 익숙해져 갔기 때문이었을까.


 초기에는 분명 신나고 즐겁기만 했는데, 괜스레 머릿속이 복잡해져만 갔다. 누군가에게는 둘도 없을 선망의 도시들이 내 눈에는 그냥그냥 익숙한 풍경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 슬펐다. 이제 막 비행을 시작하는 크루들과 밖을 나서면, 모든 게 신기해 잔뜩 들뜬 모습을 보면서 놀려대곤 했지만 어쩔 때는 그런 게 무척이나 부러웠다. 고작 얼마 만에 이렇게 된 걸까 싶어서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도시에 대해 안다고 말하기도 힘든 수준인데, 수박 겉핥기처럼 잠시 머물며 눈에 익힌 풍경이 감히 '처음'의 기회와, '설렘'이라는 감정들을 지워내고 있었다. 이래저래 매우 이중적인 감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내가 받은 큰 선물


 어쨌든 크루로서 돌아다닌 경험이 내게 준 큰 선물은 나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냥 머릿속으로만 생각해서는 답을 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나보다. 그것도 그냥 경험 말고 새로운 경험. 낯선 곳에 던져진다는 것은 익숙한 곳에서의 익숙한 내 모습이 아닌 조금은 다른 나를 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마 그냥 한국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지냈다면 몰랐을 나에 대해서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다. 취향의 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박물관에 가더라도 나는 이 부분을 더 좋아하니까 여기를 먼저 봐야겠다는 판단이 좀더 서는.


 특히 언급하고 싶은 부분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한 것은 여행이 아니라 새로운 곳에서의 사람들과의 관계, 문화적인 관심에 보다 방점을 찍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외항사 승무원으로서 돌아다닌 것은 아무래도 여러 가지 한계점을 갖는다. 24시간 또는 48시간 정도를 머무는 동안 그 도시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거나 깊이 그 도시의 흐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주 잠깐 순간이동을 해서는 아무 존재감 없이 투명인간처럼 비밀스럽게 머무는 그런 느낌이었다.


 예전에 해외 출장이 잦은 사회인이 된 지인들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여행이랑 출장은 다르다는 말이었다. 여행과 외항사 승무원으로 돌아다닌 것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다르다. 물론 도착지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는 휴식 뿐이지 무슨 소화해야 할 업무나 짜인 일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여행을 통해 얻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보통 사람들은 휴가로 여행을 계획하고, 스스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 일정을 짠다. 그러면서 최소 한 달 이상은 그 여행지에 대해서 알아본다. 출발할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 과정이 설레고 그 자체가 어떤 활기를 준다. 막상 도착하면 우여곡절 할 때도 많지만, 제한된 시간 동안 계획한 여정을 소화하면서 그 시간을 만끽하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비행하며 돌아다니는 것은 그런 부분들이 다 빠져있다. 정말 좋은 곳을 가도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게다가 요즘은 홀로 여행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어쩌다 한 번씩 혼자 돌아다니는 것은 정말 좋은 경험이지만, 거의 매번 대부분이 그런 식이다. 언제나 혼자인 나 자신이, 아무리 마음 맞는 크루들과 함께 돌아다닌다 해도, 내 가족, 친구들 등 소중한 사람들과 이 좋은 순간을 나누지 못해 안타깝고 어쩔 때는 미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무엇보다 내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고국도 더욱 그리워진다.


 비행 말고 여행

 

 비행은 업무일지언정, 그래도 보통 사람들보단 '여행'을 한다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한 달 로스터를 받으면 그래도 데이오프(day-off)가 꽤 된다. 운이 좋으면 5일 연속 데이오프를 받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연간 사용할 수 있는 휴가가 30일이니, 이것들을 데이오프와 잘 조합하면 꽤 긴 휴가를 여러 번 받을 수 있다.


 베이스가 두바이이고, 에미레이트 네트워크가 어마어마 하니, 한국에서는 마음을 꽤나 먹어야 갈 수 있는 여행들이 가능하다. 먼저 이웃한 중동 국가들, 특히 요르단 페트라라든지, 오만 등, 이집트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모리셔스, 세이셸도 두바이에서 매우 가깝다. 유럽은 흔한 선택지이고, 혹은 남미나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잔지바, 짐바브웨 빅토리아 폭포 등을 가는 크루들도 많이 보았다. 보통 비행으로 가지 않는 곳이나, 비행으로 가서 할 수 없는 긴 여행들을 계획한다.


 나의 경우는 입대 전의 남동생을 데리고 한 번, 그리고 부모님을 모시고 한 번, 그렇게 여행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비행기 티켓 할인 폭이 크니 다함께 이동해도 부담이 없는 편이다. 해외여행을 처음 해본 부모님들은 아직도 여행 이야기를 하신다. 마치 숙제를 마친 그런 기분이었다. 가족들이 모이면 그때 그랬지~ 할 만한 추억거리가 하나 더 생겨 무척이나 뿌듯하였다. 특히 새로운 세상 구경에 아이처럼 두 눈이 반짝거리던 부모님의 그 상기된 얼굴은 아마 절대 잊지 못할 거다.



 모두에게 다른 모양으로 남아야 할 여행


 어디든 다 내 발자국을 찍고 싶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의 나는 어디도 가고 싶은 곳이 없다. 이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비행하던 때를 생각해 보면, 급히 먹은 밥이 체해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너무 배가 불러서 괜스레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이 참 많았었네 싶다. 그래도 그 3년 간의 모든 돌아다닌 기록들이 마음 한 켠에 참 예쁘게도 남았다. 그렇게 지겹도록 돌아다녔으니, 이제는 미련을 떨친 것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 모든 기억과 추억들이 오늘의 나에게 큰 자산과 힘이 되고 있다.


 여행은 모두에게 다른 모양으로 남아야 한다. 요즘은 워낙 필수적인 것처럼 자리 잡은 것이 여행이지만, 여행을 가면 어떻고 또 안 가면 어떠한가. 여가를 자신에게 맞게 소비할 줄 아는 현명함, 그렇게 각자에게 더 뜻깊은 모양으로 시간이 새겨지고, 두고두고 돌아볼 좋은 추억이 되어, 또 다른 하루를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어떤 것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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