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째 아침이었다. 비 소식이 예정돼 있었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커튼을 열었다. 역시나는 역시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해가 없어서 세상이 어둑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일단 씻고 짐을 챙겼다. 일기예보를 계속 체크했는데 하루 종일 강수량이 크게 줄어들지가 않았다. 오전만 조금 오고 오후엔 그친다고 하면 걸어볼까 했는데, 일기예보상 포항 지역에는 오전과 오후 내내 우산과 빗방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결정을 해야 할 때.
까미노를 걸을 때 딱 하루, 비가 꽤 많이 온 날이 있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며칠 안 남은, 거리로는 100km가 채 남지 않은 갈리시아의 어느 곳이었겠지. 배낭은 커버를 씌우고, 몸도 우비를 입어서 가렸으나 문제는 신발이었다. 등산화여서 높이는 어느 정도 있었으나 7, 8시간 동안 계속 비를 맞으니 등산화도 버티질 못했다. 습도 100%의 발로 꾸역꾸역 걸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그 날 그 숙소는 전세계에서 온 발냄새로 가득 찼다. 12월이라 난방을 위해 틀어놓은 라디에이터 위에 수십 개의 등산화가 놓여 있었고, 그 와중에 더 빠른 건조를 위해 다들 깔창을 빼서 말리고 있어서 물냄새와 꼬릿한 발냄새가 섞여 들었다.
포항의 한 펜션에서 그 날 그 냄새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 안 되겠구나'.
지금 우리가 까미노를 걷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는 국내여행을 하면서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4일을 꼬박 걸은 남편의 무릎도 정상 상태는 아니었다. 하반기에 다시 포항으로 와서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될 일이었다.
"여보, 우리 택시 타고 포항역으로 가서 서울 올라가자."
부랴부랴 카카오 택시를 켜서 택시를 호출하고, 올라가는 KTX 표를 예매했다. 다행히 택시도 금방 잡혔고, 펜션이 살짝 외진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찾아 오셔서 역까지 쉽게 갈 수 있었다. 차도 기아의 신형 전기차인 EV6. 한 번 타 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헤헤.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비가 계속 내렸다. 와이퍼로 빗물을 닦아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걷지 않고 시원하게 포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역에 도착했다. 차 타니 편하고 빠르고 좋더라. 며칠 동안 왜 그렇게 고생하며 걸은 건가요? 허허허허.
역에서 간단히 아침 요기를 하고 기차에 올랐다. 대구를 지나고 대전 즈음에 들어서니 신기하게 비가 그쳤다. 영남 지역에만 하루 종일 비가 오는 날씨였다. 우리나라도 생각보다 넓다.
그렇게 2022년 상반기 해파랑길 유랑기는 막을 내렸다. 포항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으나 하반기에 또 오면 될 일! 서울에서 정말 가기 힘든 울진과 영덕을 내 두 발로 디뎠다는 데 의의를 두고 싶다. 그리고 남편도 나도 몸에 큰 무리 없이, 사고 없이 잘 걸은 것에 감사하다. 하반기엔 강원도 쪽으로 다시 올라갈지, 아니면 포항과 경주 쪽으로 내려갈지는 모르겠지만 어디가 됐든 재밌겠지. ¡Hasta pron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