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째다. 일어나 대충 씻고 주섬주섬 배낭을 여미는 날 보며 2015년 겨울의 스페인이 생각났다. 다닥다닥 붙은 이층침대에서 하나둘씩 몸을 일으켜 쓰리엠 귀마개를 빼고, 세면도구를 들고 화장실로 향하던 날들. 입에 칫솔을 물고 우물대며 '올라' 또는 '굿모닝'을 외치던 순간. 전날 손빨래를 하고 라디에이터 위에 올려놨던 속옷 등을 챙겨 배낭을 싸던 때. 미처 마르지 않은 수건이나 양말은 옷핀을 이용해 배낭 밖에다 걸었더랬지. 알베르게 밖에 배낭을 던져 놓고 스트레칭을 하며 다른 순례자들을 보냈던 장면 등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기억은 문득문득 떠올라 마음을 풍요롭게 해 준다. 그래서 인생에 여행이 필요한 거겠지. 세월이 지나 나이가 들었을 때 회사 다녔던 기억만 난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이튿날의 일정은 동해 대진항에서 망상해수욕장을 지나 강릉으로 진입해 35코스의 끝인 정동진까지 가는 것. 동해시에서 강릉시를 도보로 넘어가는 길이다. 이 길에는 산길이 포함되어 있다. 심곡항에서 정동진까지 가는 바닷길(바다를 끼고 걷는 길)은 '바다부채길'이라는 이름으로 관광상품화가 되어 있는데 우리가 간 시기에는 암석 낙하 등으로 인해 출입통제 중이었다. 원래는 해안 경비를 위해 군 경계, 정찰용으로만 사용된 길이었는데 어느 순간 관광을 위해 개방을 한 듯했다. 입장료는 성인 3,000원이라고 한다. 출처는 바다부채길 홈페이지.(https://searoad.gtdc.or.kr/) 홈페이지를 둘러보니 통제가 풀리면 가볼만할 것 같다. 걸으면서 계속 동해 바다를 볼 수 있는 길인데 안 갈 이유가 어딨겠는가.
이날 아침 우리의 목표는 망상해수욕장의 롯데리아에 가서 조금 늦은 아침을 먹는 것. 비수기라 운영을 안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네이버 지도에 분명히 롯데리아가 있었고 1월에 포스팅된 방문객 리뷰가 있었다. 하지만 운영 시간이 나와 있지 않았다. 10% 정도의 불안감을 안고 망상으로 향했다. 망상은 예전부터 캠핑하러 오고 싶었던 곳이다. 여름 성수기엔 캠핑장 예약이 정말 하늘의 별 따기라 오지 못했는데 이렇게 걸어서 오는구나 싶었다. 캠핑장을 지나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였지만 텐트가 몇 개 보였고 카라반 밖에서 아침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망상 바다는 참 넓었다. 넓고 평화로웠다. 사진으로 다 담기가 힘들 정도로. 왜 동해시에서 망상에 캠핑장을 만들고 리조트까지 지어 열띤 관광객 유치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남편과 내가 바다를 보고 처음 한 말은 "넓다!"였다. 바다가 넓지 그럼 좁냐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포항의 호미곶이나 울산 간절곶처럼 지형적으로 바다가 길게, 수평으로 뻗지 못하고 중간에 곶 등으로 인해 가로막히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망상은 그런 지형 없이 정말 백사장과 바다가 곧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롯데리아는 있었는데 없었다. 공사 중이었다. 하..... 이래서 비수기의 여행엔 장단이 확실하다. 사람이 적고 조용하고 싸지만 뭔가 문을 안 열거나 운영 시간이 짧거나 뭐 그렇다. 까미노를 걸은 시기도 비수기였다. 그래서 영업을 하지 않는 알베르게가 많아서 매일 출발 전에 알베르게 사이트를 통해 여는 곳을 찾아보고 그곳으로 가야 했다. 성수기에는 모든 알베르게가 문을 열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글을 순례자 카페에서 봤었다.
새우버거를 야무지게 먹겠다는 꿈을 버리고 바로 옆 카페로 들어갔다. 공복에 1시간 정도 걸었더니 몸이 당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간단하게 커피와 빵으로 요기를 하고 또 길을 재촉했다. 망상을 지나 조금만 더 걸어가면 강릉이었다. 강릉 가는 길은 완전 바다 옆은 아니었다. 철길 때문에 도로로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덕분에 멋진 풍광을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강릉 입성. 촌스럽게 사진을 남겼다.
이제 34코스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옥계해변을 지나면 바로 한국여성수련원이 나오고 그 입구에 스탬프가 있다. 34코스의 끝이자 35코스의 시작이다.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 금진해변이 있는 금진마을에서 점심도 먹고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정말 바다 바로 앞 작은 마을이었다. 강릉을 수도 없이 왔지만 매번 안목이나 강문, 경포 같은 유명한 해변만 가서 강릉의 모든 바다는 다 그렇게 크고 관광객이 많은 줄 알았다. 역시 다녀봐야 깨우친다. 강릉에도 이렇게 작고 조용한 바다가 있다니.
점심으로는 마을 토박이 분이 하시는 듯한 식당에서 코다리조림을 먹었다. 착한 가격에 넘치는 양을 주셨다. 잘 먹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첫날 묵호항 가는 길에 마주쳤던 커플이 있었다. 우리보다 나이는 어려 보였고, 무엇보다 진짜 거대한 배낭을 메고 있어서 눈에 확 띄었다. 해파랑길을 걷는 이가 별로 없었기에 반갑다 생각하며(속으로만) 지나갔었다. 그런데 이 커플이 금진마을의 이 식당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가 한창 코다리 살을 발라내고 있을 즈음이었다. 아마 그들도 우리를 보고 놀랐겠지. 지금 생각하니 어디까지 가냐, 어느 정도 일정으로 걷냐 한 번 물어라도 볼 걸 싶다. 좀더 나이가 들고 아주머니화가 되면 오지랖이 넓어지려나. 분명 우리와 같은 길을 가고 있었을 텐데 이 식당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 즐겁게 여정을 마무리했길. 늦게나마 빌어본다.
금진마을을 지나 심곡항까지는 바다를 끼고 걷는 풍광 좋은 길이었다. 관광객도 많았고 차도 많았고. 일요일이라 더욱 그랬을 터다. 정말 해파랑길 느낌이 난다,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보다 우리 동해가 훨씬 예쁘다 등 연신 감탄의 말을 내뱉으며 쭉쭉 걸어나갔다. 시간은 많이 없으나 해파랑길 느낌을 내며 조금이라도 걸어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할 만한 코스다. 길 이름도 따로 있구먼. '헌화로'다. 글을 쓰며 알았는데 이 길이 2016년 tvN에서 방영됐던 '시그널'의 마지막 씬에 나왔다고 한다. 35코스의 강릉 옥계해변 ~ 금진해변 ~ 심곡항까지. 정말 바다를 우측에 놓고 시원하게 걸을 수 있다.
이런 느낌의 길이랄까
중간 중간 이런 기암괴석이 많다
그리고 35코스의 마지막. 심곡항에서 정동진까지 가는 길이 남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바다를 끼고 걸으려면 해파랑길에서 살짝 비껴나 강릉시에서 만든 '바다부채길'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갔을 때는 낙석 등으로 인해 그 길이 통제가 된 상황이라 너무나 정직하게 해파랑길을 그대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 구간이 산길이라는 점.
'아니 해파랑길은 모두 바다 보고 걷는 길 아닌가요?'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군데군데 산을 넘는 구간이 있었고 그날이 그날이었다. 아래 지도에서 보이는 '삿갓봉'을 넘는다 생각하면 된다.
산 위에서 만난 조망. 멀리 보이는 저 건물은 심곡항 가기 전에 위치한 '탑스텐 호텔'이다.
엄청 험한 산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니 물과 간식 등을 잘 챙겨야 한다. 강릉바우길과도 겹쳐 있어서 길마다 리본 표식을 어마어마하게 볼 수 있다. 리본을 요리조리 잘 따라가면 어느덧 정동진, 그 유명한 정동진에 다다를 것이다. 서울 광화문의 '正' 동쪽이라 해서 '정동진'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 새해마다 하나씩의 소원을 가슴에 품고 해맞이를 보러오는 사람들도 북적이는 곳. 그리고 90년대를 살았던 이에게는 SBS 창립 기념 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지로 가장 유명한 곳이다.(나는 '모래시계' 세대는 아니지만 구전으로 굽이굽이 전승된 얘기를 들었더랬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었는데 바다를 보며 감동에 빠질 새도 없이 몸은 간절히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산을 넘어온 여파가 있었다. 모래시계 공원 뒤편의 숙소로 가 뜨끈한 물에 샤워를 하고 온돌 방바닥에 몸을 지졌다. 으따 시원타. 좀 쉬다 어슬렁거리며 나가 바닷가 산책을 하고 치킨집에 들어가 반반통닭과 생맥주 한 잔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횟집, 조개구이집 등이 즐비했으나 나름 '운동'을 해서 그런지 몸이 동물성 단백질을 원하더라. 남편은 바닷가 와서 'ㅊㄱ집 양념통닭' 가는 사람은 나뿐일 거라고 놀려댔다. 그러나 우리 이후로도 관광객으로 보이는 손님들이 계속 닭집으로 들어왔다. 바다 보고 통닭에 맥주 한 잔 하는 거, 너무 맛깔나지 않나요?
영롱하다 영롱해
그렇게 35코스와 둘째날도 마무리. 강릉에 입성했고 작은 산 하나도 넘었으며 정동진에도 다시 왔다. 치킨도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