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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온다 Jun 09. 2022

TV에 나온 나의 민원인 1

고민 많은 공무원의 일기

수도권의 한 검찰청 민원실에 근무하고 있다. 올해 8월이면 만 2년을 채우는데, 다들 묻는다. 힘들지 않냐고. 민원실은 전국 모든 검찰청 직원들이 기피하는 부서다. 이유는 당연하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많이 벌어지고 다종다양한, 아마 살면서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부류의 '손님'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택한 이들 중 직장에서 모험이나 스릴을 즐기길 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기에(업무와 조직의 특성상) 순간순간 임기응변과 재빠른 판단을 요하는 민원 업무는 이 세계에서 인기 있는 일은 분명히 아니다.


그런 것치고는 꽤 오래 일한 편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관찰하는 걸 좋아해서 그런 것일까. 타인의 말에 크게 동요되지 않는 기질 때문일까. 주변에선 민원실에 거의 2년 가까이 근무했다고 하면 다 놀란다. 대단하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많다. 물론 기빨리고 입에서 단내가 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상황이 자주 오지만 좋은 점도 있고 배우는 점도 많다.


좋은 점 1. 각종 보고나 결재로부터 자유롭다.

좋은 점 2. 무조건 칼출! 칼퇴!가 가능하다.

좋은 점 3. 당직을 적게 선다.

좋은 점 4. 감사를 받지 않는다.


나쁜 점도 물론 많다.


나쁜 점 1. 점심시간을 칼같이 지켜야 한다.(일반 부서는 점심시간을 앞뒤로 조금씩 여유롭게 가질 수도 있다. 찾아오는 손님이 없으므로.... ㅠ)

나쁜 점 2. 한번 방언 터진 손님이 오거나 청력이 저하되어 내 말도 안 들리고 본인 말도 안 들려서 데시벨이 매우 높은 손님이 오면 매우 시끄럽고 그 시끄러움이 오래간다.

나쁜 점 3. 주거가 불분명하거나 수급비를 받아 생활하시는 손님들도 꽤 오는데 열에 아홉 꼴로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며 온다. KF94 마스크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윽한 향을 계속 맡아야 한다.


그럼 배우는 점은 무엇이냐.


사람에 대해 배운다. 정말로. 죄지은 사람, 전과가 수십 개가 되는 사람이 오면 저렇게 살면 안 되겠다, 이런 게 아니라, 사람은 사는 대로 살아진다 라는 말을 뼈저리게 느낀다. 불특정 다수를 만나는 일을 계속하니 대충 관상도 보이고 말 한마디만 들어도 그 삶이 지나온 길이 아주 대~~~충은 보인다.


지금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법알못' 유형이다. 볼일을 보러 온 이들이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나는 법을 모르니까~!!' 라는 거다. 물론 법, 어렵다. 단어부터 쉽지 않다. 기소, 불기소, 항고, 재정신청, 공소권없음, 구약식, 구공판, 송치, 불송치, 인지.... 외계어 천지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고소해서 처벌하기를 원한다면, 그래서 내 피해가 회복되길 원한다면 공부를 조금은 해야 한다. 자신이 쓰는 고소장의 글자 한 자 한 자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호사를 구할 형편이 안 된다면 요새는 도와주는 곳도 많다. 법무부 마을변호사 제도라든가 전국 각 지역에 있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이라든가. 그런데도 '법알못'을 내세우며 남이 다 해주길 바란다. 고소장을 대신 써달라는 똥배짱 유형도 있고 자기가 '법알못'이라 아무것도 모른 채 사건이 지나갔다며 하소연하는 징징이 유형도 있다.


쉽게 말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지 않는 부류다. 본인이 원하는 게 있고 그걸 얻어내려면 노력을 해야 한다. 노력 없이 이뤄지는 건 없다. 로또 정도? 부동산, 주식, 코인 모두 공부를 하고 정보를 얻어야 한다. 하물며 누군가를 형사적으로 처벌해달라는 그런 큰 요구를 할 때는 그만큼 준비를 해야 한다. 평생을 비주체적으로, 비주도적으로 살아온 이들의 행동과 말에는 노오오오오력과 고오오오오옹부가 저어어어어언혀 없다. 그 삶이 그대로 얼굴에 묻어 있다. 죽기 전까지도 남 탓만 하다 죽겠지.


그리고 굉장히 어쭙잖지만 그들이 살아온 세월을 조금씩 추측해보기도 한다. 소설 속 캐릭터의 서사를 창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2편에서, 내 소설 속 주인공이었던 한 할머니 민원인의 얘기를 해 보려 한다. 커밍 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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