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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Jun 26. 2020

문득 절교의 시간이 나를 부를 때



세수를 하다 갑자기 그 애는 잘 지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이런 식이다. 그 앤 내가 들여다볼 수 없는 기억의 심해를 마음대로 헤엄치다가 내가 그 애를 완전히 잊어버릴 때쯤, 문득 수면 위로 올라와 작은 파문을 하나 만들곤 사라진다. 그 애가 어떻게 지내는지, 이젠 아무리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데도.
 
그 애와 나는 고등학교 2학년에 만나 꼬박 7년을 함께했다. 처음엔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8~9명이 되는 무리 속에서 다 같이 보면 보고, 굳이 따로 만나지는 않는 그 정도의 관계. 매일 등교해서 봐야 하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 친해질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반이었고, 마치 낯선 음식을 좋아하게 되는 과정처럼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친해지게 된 것은 같이 휴학을 하게 되면서였다.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다. 가정형편이 그랬고, 처해 있는 상황이 그랬고, 속에 감춰둔 무거운 감정이 그랬다. 아니 내심 그런 것 같았다. 우리는 많아진 시간만큼 더 자주 만났고, 나는 그 애를 친구이면서도 막냇동생처럼 아꼈다.


우리는 청춘의 바람을 타고 자전거로 제주도 일주를 하기도 했다. 나는 자전거를 제대로 탈 줄 모르는 상태로 출발해, 페달을 다섯 번 밟고 한번 넘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자전거를 배웠다. 숙소도 정하지 않고 아침에 눈을 떠서 해가 질 때까지 자전거를 탔다. 해가 지는 순간 도착하는 지역이 우리의 숙소가 되었다. 몸은 고되었지만,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행복했다.

  휴학의 화살은 순식간에 나를 학교의 과녁으로 밀어붙였다. 나는 도살장에 끌려다니는 기분으로 마지막 학년을 다녔고, 그 애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다시 재휴학을 한다고 했다. 아마 그때쯤이었을 거다. 그 애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은 게. 마침 나는 대학교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참이었다. 그 애의 부모님은 혹시 그 애가 나쁜 선택을 하는 게 아닐까 경찰에 신고하고도 모든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고, 나는 숙소 복도에 기대어 다음날 해가 뜰 때까지 밤새도록 그 애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디 있어?’ 같은 말은 보내지 않았다. 그런 말들이 도움되지 않는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았다. 두세 줄만 읽어도 가슴 아리던 문장들, 버스 창밖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던 노랫말들을 꾹꾹 눌러 담았다. 마지못해 살아가는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여기 또 있다는 걸 그 애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그 애를 얼마나 생각하는지도. 다음날 아침, 그 애는 밤잠을 이루지 못해 공원을 서성이다 할머니 집 앞에서 발견되었다.

  다 같이 모여 즐겁게 놀고 헤어진 어느 날, 그 애는 아무 전조도 없이 단체 카톡방을 나갔다. 그 애는 놀라서 전화한 친구에게 ‘너희 중에 싫은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을 차단했다.’고 말했고, 나는 한 시간의 신호음 끝에서야 내가 그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끊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제스처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관계의 끝은 키보드에서 마침표를 치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그 애와 다시 연락이 닿기 전까지 나는 아무 일을 하다가도 나의 잘못을 생각했다. 다른 친구를 통해 넌지시 어떤 말이 문제였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서는 그게 무슨 말이었을까를 고민했다. 전날 내가 무슨 말을 했더라. 이 말이 그 애에게 상처였을까. 저 말이 문제였을까. 그 애한테 한 말을 되새기면서 쉽게 말을 내뱉었던 내 자신을 탓했다. 나는 가끔 절교를 선언하기까지 그 애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지를 생각하며 울었다. 오랜만에 들어간 페이스북에서 남겨진 그 애의 메시지를 보기 전까지.

  보고 싶다.
  그 애의 감정은 관계를 끊을 때에도, 다시 잇고자 할 때에도 지나치게 솔직했다. 나는 겨우 4음절에 지나지 않는 문장을 몇 분이고 바라보다 아무 답장 없이 페이스북을 로그아웃했다. 그동안 나는 습관적으로 그 애를 생각했고, 또 미안해했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였고, 그 애를 떠올린 오랜 시간은 내게 미안함을 각인시키고, 그 애를 아끼는 마음을 받아갔다. 이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8개월 후, 다른 친구들을 통해 그 애가 사과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다들 그 애를 만나보길 적극 권유했으므로, 나는 절교당한 또 다른 친구 A와 함께 그 애를 만났다. 그 애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너희는 변한 게 없다며 쏘아붙였다. 좋은 자리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온 나와 A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붙었다. 그 애는 ‘내가 너무 착해서 너희에게 싫은 소리를 못했다.’며,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읽고 용기를 내게 됐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애는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라 마음껏 상대를 휘두를 용기를 가지고 돌아온 듯했다.


두서없이 너희가 나빴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그 애에게 나는 덜덜 떨리는 양 손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나의 어떤 행동이 너를 상처 입게 했냐고. 그 애는 잠시 고민하더니 짧게 대답했다.
  “A는 지각하는 게 문제였고, "
  “... 너는 기억이 안 나.”
  몇 달간 수없이 고민했던 문제의 답은 이렇게도 덧없이 결론지어졌다. A가 화난 목소리로 그 애가 지각한 수많은 사례를 늘어놓는 사이, 나는 옆에서 조용히 울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의 장례에 상주도 나 혼자, 조문객도 나 혼자. 사람들이 북적이는 대학로 앞 카페에서, 지난 시간 속의 추억들이 재가 된 유골처럼 흩어졌다.

  한참을 울던 내가 그동안 그 애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말하자, 그 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힘들었을 줄은 몰랐네,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 그럼 우리 이제 다시 친구지?’

그때 나는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서있었으므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그 애가 원하는 대로 자리를 옮겼다. 그 애는 쾌활히 웃으며 우리가 절교했던 동안 자신이 다른 친구들과 얼마나 잘 지냈는지를 자랑했고, 대뜸 A의 카드를 가져가 음식을 사 먹었다. 다시 단체 카톡방에 초대해주기를 요구하다가 그 애가 자신의 친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쯤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그러나 내가 3년의 수험생활을 거치는 동안 그 애는 그 단체 카톡방의 친구들과 차례대로 절교했고 내가 시험을 그만두던 해 모두와 연락이 끊어졌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그 애를 어렴풋이 이해한다. 내 우울이 나와 가족들의 사이를 엉망으로 파헤쳐놓는 동안, 그 애의 우울은 그 애를 얼음 호수 위에 세워두었던 것이다. 지나간 시간 속의 내가 가족들이 던진 사소한 말을 참을 수 없어 긴 우물을 파헤치던 것처럼, 그 애에게 쏟아진 가시들은 호수 위에 균열을 만들고 끝내 그 애를 빠뜨리고 말았다. 내가 파다만 구덩이에는 이제 하나 둘 싹이 피기 시작하는데, 그 애의 호수는 그 애에게 봄을 돌려주었을까. 더 이상 그 애의 소식을 알 길이 없는 나는, 그 애가 멋진 수영 솜씨를 가졌기를 기도할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어렴풋한 동질감을 느끼며 가까워진 것이, 서로의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지도 않고 다 이해하는 척했던 것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무엇이 문제였든, 아마 나는 평생 그 애를 잊을 순 없을 것이다. 그 애도, 그 애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도.

  행복이 우리를 감싸고 공전할 때, 일정한 주기로 어둠은 우리에게 온다. 어둠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받아들일 뿐. 그 어둠이 어떤 의미였는가는 돌아온 빛이 내 발 밑의 그림자는 비출 수 없다는 것을 보며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문득 절교의 시간이 나를 부를 때, 내가 그 애를 생각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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