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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Sep 26. 2021

먼 길을 돌아 비로소 보이는 것들

우리는 나란히 걸을 때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 5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언제나 내 장례식장에서 우는 가족들을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엉엉 울고 나면 그래도 조금 기분이 풀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런 상상도 전혀 슬퍼지지 않는 때가 왔고 내게 곧 운명처럼 죽음이 오겠구나 생각했다.


유일한 걱정은 내가 죽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들을지도 모르는 가족이었다. 부모님이 내게 요구하는 것들이 버겁고 내게 건네는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롭게 다가올 때였지만, 그래도 내가 그만 살고 싶다는 이유로 두 분의 삶까지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타협을 했다. 나는 ‘잘’ 살고 싶어서 죽고 싶은 거니까, 부모님의 자랑이 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죽고 싶은 거니까. 그럼 ‘잘’ 살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냥 대충 살면서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시면 그때 죽자. 그럼 적어도 그 두 분이 사는 동안 자살한 딸의 이야기로 괴로우실 일은 없겠지.


부모님께 죽은 딸이 있는 것보단 자랑거리는 못되더라도 어디서 밥이라도 빌어먹는 딸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죽는 것보다는 뭘 하더라도 살아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효도를 하는 셈이다. 참 우스운 자기만족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핑계로나마 사는 것을 선택했다. 내게는 참 먼 길을 돌아온 살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나는 종종 혼자서 내 인생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누군가 내 곁에 있다고 생각하고, 내 삶, 내 인생, 나의 감정, 나의 선택, 선택의 이유와 결과까지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의 청자는 때로 가상의 부모님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고, 누구인지 모를 타인이기도 하며 내 스스로이기도 했다.     


하루는 고구마 말랭이를 말리려고 삶은 고구마를 썰어대면서 서울에 가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서울에 가서 살아보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면 내 속의 미운 마음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인생을 새롭게 다시 한번 살아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평생 가족을 위해 선생님이 되어야만 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던 내게 임용을 포기하고 타지에 가서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선택이었다.     


“나는 조금씩 더 나아지고 싶은데 갈수록 점점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야. 내가 되고 싶은 나는 멋지고, 뭐든 잘해보려고 노력하고, 새로운 걸 알아나가는 걸 좋아해서 열정적으로 도전하는 사람인데. 지금 나는 그냥 여기서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하잖아.”    

 

  여기까지 말했을 때 이미 얼굴은 눈물범벅이었고 콧물까지 훌쩍대고 있었지만 두 손에는 고구마가 잔뜩 묻어있어서 차마 닦지도 못했다. 나는 그 상태로 고구마를 썰어가면서 ‘나’와 이야기했다.  

    

  “너는 임용을 치고 싶지 않잖아. 내가 알아. 교단에 서는 걸 생각하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느낌이라고 했었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뭐야?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 아니야. 그 말은 그냥 핑계야. 그냥 네가 무서워서 그렇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게 무서운 거잖아. 두려움은 부숴버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 너는 언제든지 시험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흘러가 버린 시간은 절대 돌아오지 않아.”     


  어쩌면 나는 그런 행위를 통해서 나를 설득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용기가 없었고 내 상황을 이해하고 나를 지지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나를 이해하고 지지해줄 사람은 오로지 나 밖에 없었으므로, 나는 나와 대화하면서 내가 용기 내어 뛰어나갈 그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나는 ‘나’와의 수 번에 걸친 대화 끝에 서울행을 결정했다. 주변에서는 이런 내게 너는 그냥 의지가 없어서 도피하는 것뿐이라고 비난했지만 나는 이게 도피라도 좋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사람이 힘듦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상황에 얽힌 배경과 인물을 모두 버리고 완전히 떠나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을 사랑하지만 기대가 버거웠고, 친구들을 사랑하지만 내가 부유하는 동안 정착하는 모습이 못내 부러웠다. 내가 원하지 않은 삶의 모습 속에서 매일 괴로웠다.


이 괴로움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 모두 훌훌 버리고 타지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내 인생의 2막이 시작되었다.




출판 스튜디오 '쓰는 하루'에서 <남김없이 응원해>로 출판했던 글을

브런치에서도 같이 읽고 싶어 업로드합니다:)


책쓰게 9기 출간 도서 <남김없이 응원해>

-출판사 : 키효북스

-저자 : 이상은, 신나윤, ㅅㅅㄱ, 신성희, 황지영, 정진이, 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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