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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Jul 02. 2020

필사의 여정

마음이 울렁이는 밤이다. 오늘 같은 날이면 나는 필생 하기 위하여 필사를 한다. 필사(筆寫) 하는 자는 살고, 요행이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1]이라는 장수의 마음으로.

  

내 필사의 여정은 연필을 깎는 것부터 시작한다. 지난 필사로 뭉툭해져 있는 연필을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깎는다. 칼이 나뭇결을 쓸어내리는 것을 쌓인 눈 위에서 한 알의 눈 결정을 만지는 듯이 조심스럽게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최대한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 순간을 ‘필사를 위한 동적 명상’이라고 부르는데, 최대한 생각을 비우고 칼의 얇은 날이 단단한 나무 틈을 가르는 찰나를 보는 데에 집중하려 한다.


 이 필사적 시간이 내가 유일하게 연필을 쥐는 순간이다. 글자 하나하나에 신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안다’를 ‘않다’로 잘못 쓴 채로 남겨두고 싶지 않으므로 연필을 쓴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게 스스로 실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실수하면 절대 되돌릴 수 없음을 알면서도 볼펜을 들 수는 없다.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실수하면 다시 고쳐 쓰겠다는 마음이 중요함을 되새긴다.




충분히 연필을 가다듬고 나면 책장 앞에 서서 인상 깊은 구절이 있었던 책을 모두 꺼낸다. 나는 인상 깊지 않은 책을 집에 두지 않으므로, 사실상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책을 다 꺼내는 셈이다. 그리고 아무것이나 손에 집히는 책을 들고 아무 페이지나 연다. 눈에 띄는 구절을 찾을 때까지 이를 반복한다. 되도록이면 소설은 필사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달래기에 벅차, 타인의 이야기를 곱씹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주로 인문학이나 과학책을 쥐게 된다. 삶과 진리, 우주의 흐름을 말하는 문장들을 받아 적는다.


… 이것이 뜻하는 바는, 시간은 의식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반성 없이 목전의 사태에 매몰된 채 사는 것은 ‘무시간적으로’ 사는 것이라는 뜻이다. [2] …


한두 문장을 쓰다 보면 마음속의 우울이 다시 출렁이며 파도를 만든다. 파도치는 바다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 기다림이다. 나는 나머지 글자를 써 내려가며 파도가 몰아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둔다. 내 삶의 수면에 언제나 부표처럼 떠돌던 억울함, 슬픔, 분노, 우울 같은 것들이 파도를 타고 쏟아진다. 파도는 무섭게 치솟다가 이내 제 몸 위로 떨어진다. 스스로를 때리는 것이 지겨워질 쯤이면 저 먼 절벽으로 달려가 부서져보기도 한다. 나는 흑연을 내리누르며 파도가 물에서 다시 물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대개 이 필사의 여정은 한두 페이지 이내에 막을 내리지만, 가끔 도저히 파도를 견딜 수 없을 때면 ‘시’머니즘의 도움을 받는다. 대뜸 시부터 쓰지 않는 것은 시의 주문은 감정이 어느 정도 무르익어야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시가 좋은 부적이 될지는 날마다 다르다. 어떤 날에는 꽉 끌어안고 싶은 시가 또 어떤 날에는 낯선 얼굴로 보이기도 하므로. 오늘 유독 가까이하고 싶은 시를 찾았다면 필사(筆寫) 끝에 즉생(則生)한 것으로 필사의 여정을 마친다.


흘러나오는 슬픔에
방은 점점 좁아들고 천장은 낮게 가라앉았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멀리서는 아직 지상의 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방이여, 내 위에 따뜻한 흙을 덮어다오
낙산이여, 그만 무너져다오
이제 나를 안아다오[3]


파도여, 내 위를 잔잔한 수면으로 덮어다오. 필사의 여정이여, 그만 무너져다오. 이제 나를 안아다오….



          


[1] 필사즉생(必死則生), 행생즉사(幸生則死)

[2] 이종건, 「살아있는시간」, 궁리, 17-18쪽

[3] 나희덕, 「그곳이 멀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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