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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Jul 01. 2020

진정한 어른의 음료를 아십니까?

커피도 아니고 술도 아닌

내가 아주 어릴 적엔, 어른들이 먹는 커피의 맛이 궁금했다. 특히 어른들이 커피 한 잔씩 들고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명절이면, 나는 엄마 옆구리에 딱 붙어 한입만을 외치곤 했다.


엄마는 이건 어른들이나 마시는 거라며 나를 타일렀지만, 옷자락을 붙들고 한 입만을 외치는 나를 단념시킬 수는 없었다. 그땐 그렇게 얻어먹는 한 입이 어찌나 달던지. 나도 얼른 어른이 되어 내 몫의 한 잔을 받을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그땐 커피가 진정한 어른의 음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커피에 대한 갈망이 무색하게도,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언제든지 자유롭게 커피를 마실 수가 있었다. 그때의 커피는 맛있는 음료가 아니라 생존수단에 가까웠다. 앉아서도 졸고 서서도 조는 몸을 어떻게든 제어해보기 위한 노력.


그러고 나니 진정한 어른의 음료는 술인 것 같았다. 법적으로 성인들만이 마실 수 있는, 미성년자인 내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 그 미지의 음료를 알고 싶어서 몰래 술을 마셔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어른들이 그걸 왜 마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학생이 된 나는, 동기들이 학교에서, 동아리에서, 엠티에서 술을 마시는 동안 뒤에서 조용히 나가떨어진 술꾼들을 챙겼다. 나도 술을 어느 정도는 마셨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시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게 많이 먹을 만큼 술이 맛있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술을 찾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랬기에 더욱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인생의 쓴맛을 다 겪고 나면 소주가 달게 느껴진다는데. 그게 정말 일까 궁금했다. 그러다 우연히 칵테일에 입문하게 되면서 술을 한두 잔씩 즐기게 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칵테일은 테킬라 슬래머. 어느 순간부터는 쓸데없이 겉멋이 들어서, 내 취향의 싱글몰트 위스키를 찾겠다며 온갖 위스키를 마셔보기도 했다. 그땐 그게 어른의 맛, 어른의 음료라고 생각했다.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나는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술 마시는 자리에는 빠짐없이 참여했다. 처음엔 소주를 못 마시니 맥주를 마시겠다고 했고, 그다음엔 자연스레 소맥을 마시게 됐고, 결국 사이다를 섞으면 소주가 맛있다는 팀장님의 추천으로 쏘사(소주+사이다)에 입문하게 됐다.


그렇게 차근히 술을 마시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나는 술시가 되면 술이 생각나는 직장인으로 자라났고, 화요일마다 술을 마시는 모임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와 깨달은 것은, 사실 커피도 술도 진정한 어른의 음료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어른의 음료는 무엇인가? 바로 물이다. 나이가 들고,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식단에 신경을 쓰게 된다. 콜라나 오렌지 주스, 믹스커피처럼 설탕이 많이 든 음료는 피하고, 마실수록 사람을 더 피곤하게 할 뿐인 커피와 녹차도 되도록이면 적게 마시려고 한다. 술은 두말할 것 없는 1순위 금지 항목이다.


어른이 되면 '이 썩는다', '건강에 나쁘다' 하는 잔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돌고 돌아 허락된 음료는 물이다. 그것도 따뜻한 물. 이외에 또 어떤 것이 ‘진정한 어른의 음료’라고 불릴 수 있겠는가.


 왜 신은 몸에 좋은 것이 입에도 맛있도록 만들지 않았을까. 이젠 내 몫의 커피가 있고, 퇴근 후 소주 한 잔의 의미도 알지만 더 이상 그것을 마음 편히 즐길 수는 없다. 위가 아파 커피를 마실 수 없고, 간이 걱정돼 술을 마실 수 없는 것이 진정한 어른의 삶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기 위한 우리의 시행착오는 이렇게 안타까운 결말에 착륙하고 만다. 커피에 익숙해지고 술에 익숙해졌던 것처럼, 물에 익숙해진 사람이 있다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커피 너머에 술, 술 너머에 물이 있었던 것처럼 물 너머에도 무언가가 있는지.


  혹시 진정한 어른의 음료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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