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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Jun 30. 2020

겪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

다리 통증이 내게 남긴 깨달음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발을 딛자마자 덜컥 겁이 났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나을 줄 알았던 다리 통증이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닐 거야', '괜찮을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왼발을 딛고 일어난 나는, 결국 다리에 힘을 주지 못해 앞으로 고꾸라졌다.


안 죽으면 괜찮은 거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자라 열이 39도를 넘어야 병원에 갈까를 고민하는 나이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병원에 가지 않으면 큰일이 나겠다 싶어 서둘러 병원에 갈 준비를 했다.


겨우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짧은 시간 동안에, 나는 한쪽 다리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체험했다. 바지를 입을 때 어떤 다리를 어떤 모양으로 사용하는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바지를 입다 다시 한번 넘어질 뻔하고서야 멍청히 서서 '아, 바지를 입으려면 한쪽 다리로 번갈아 서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이후 병원을 가는 길도 고난의 연속이었다.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 5분, 거기서 버스로 5분, 버스에서 내려서 다시 병원까지 걸어서 5분. 겨우 15분 남짓한 거리기에 굳이 택시를 타지 않아도 그 정도야 문제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에 있는 수많은 턱들과 씨름하다, 버스정류장 바로 앞의 육교 계단을 딱 세 칸 밟은 뒤 도로 내려왔다. 나는 또 그제야 새삼스럽게 계단은 한 발 한 발 올라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출퇴근할 때는 매일같이 뛰어서도 올라가던 육교인데, 오늘만큼은 그 높이가 어찌나 높던지. 다행히 그동안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육교 엘리베이터 덕분에 겨우 버스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하고 보니 이젠 버스 타기가 난관이었다. 낮은 육교 계단보다 훨씬 높은 버스의 계단을 올라갈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저상버스가 있어서 저상버스를 기다려 타긴 했지만, 겨우 계단 두 칸을 못 올라간다는 이유로 더운 여름날 햇빛이 내려쬐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병원 방향으로 가는 버스 대를 보내고 나니 갈 곳 없는 울분과 미안함이 치솟았다.


나야 어제오늘 갑자기 다리가 아픈 거지만, 디스크나 관절염 등으로 다리가 아프신 분들은 매일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우셨을게 아닌가. 그런 인구가 적지 않을 텐데 아직도 이렇게 대중교통 타기가 불편하다니. 물론 육교  엘리베이터와 저상버스가 없을 시절에 비하면 좋아진 거지만. 그래도 병원으로 향하는 길 내내 절뚝이는 발자국 아래로 아쉬움이 진하게 배었다.




병원에서 평소에 원래 통증이 없었어요? 음? 정말로? 하는 의사 선생님의 의아한 목소리에 불안함을 안고 엑스레이를 찍은 결과, '아마도' 고관절 충돌 증후군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받았다. 아... 증후군. 세상 많은 질병들이 삶의 질을 떨어트리지만 '증후군'이 붙은 질병들은 특히 그렇다.


일반적으로 병의 원인이 확실하고 명확한 치료 방법이 있다면 딱 떨어지는 병명을 붙인다.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붙었다는 것은 원인은 잘 모르겠는데 이런저런 증상들이 나타난다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걸 대충 무슨무슨 증후군이라고 부르자!했다는 것이고, 결론적으로 평생 사는 동안 조금씩 아프면서 사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마치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나의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아직도 나를 떠나지 않고 시시때때로 생활을 괴롭히는 것처럼.


의사 선생님우선 소염진통제를 일주일 먹어보자고 했다. 아직까지 일상생활에 문제는 없으니까. 일주일을 먹어보고도 낫지 않으면 관절 조영술을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MRI를 찍어보고, 그래도 안되면 부인과나 다른 질환을 의심해 보고, 그래도 그래도 안되면 대학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속 시원한 결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는 병명을 알았다는 것에 만족했다. 아침에 부리나케 병원에 오지 않았더라면 주말 내내 고관절 통증, 다리 통증 같은 것들을 검색하면서 곧 못 걷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함에 시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터넷 검색 결과는 아픈 사람을 겁먹게 하기 위한 최적의 도구이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러니하게도 저상버스에는 계단을 오르지 않고 앉을 수 있는 자리가 6개밖에 없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고, 잠시 들린 카페에서 절뚝이는 걸음으로는 음료를 쏟을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 또한  다시금 깨달았다. 겨우 다리 한쪽을 디디기 불편하다는 게 삶의 모습 곳곳에 이렇게 많은 영향을 미칠 줄이야.


때로 겪어보고 나서야 알게 되는 일들이 있다. 사실 세상의 아주 많은 일들이 그렇다. 우리는 어른이 되고서야 어른들의 말을 이해하고, 부모가 되고서야 부모님의 행동을 이해한다. 경험하기 전에는 그런 세상에 있는지도 모르다가,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알던 세상 밖의 세상을 만나게 된다.


며칠간 약을 먹으며 상태가 호전되고 나니, 어쩌면 내 다리가 내게 이런 걸 알려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너는 너무 네 삶에만 골몰했다고, 겪어보지 못한 삶을 겪어보고 이해하라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내 다리에게 깨달음을 주어 고맙다고 인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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