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자신에게 적절한 위로를 하지 못할까?

자기비판과 자기보존사이에서 길을 잃은 언어

by 이수염

사람은 평생 수많은 말을 들으며 살아간다.

칭찬도 듣고, 지적도 듣고, 때로는 위로도 듣는다. 우리는 타인의 말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어떤 말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고, 어떤 말은 우리를 오래 붙잡아 두기도 한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타인의 말에는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서툰 것일까.


살다 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평가를 받는다. 학교에서는 성적으로, 직장에서는 성과로, 관계 속에서는 태도로 평가받는다. 누군가는 우리의 장점을 말해주고, 또 누군가는 우리의 부족한 점을 지적한다. 우리는 그렇게 외부에서 들려오는 평가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 놓치기 쉬운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적절한 말을 잘 건네지 못한다. 어떤 순간에는 칭찬이 필요한데 스스로를 비난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반성이 필요한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우리는 타인의 평가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말을 정확히 선택하는 일에는 서툴다.


예를 들어 실패를 경험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이미 결과는 좋지 않았고, 마음도 어느 정도 상처를 입었다. 이런 순간에 필요한 것은 사실 위로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할까.” “역시 나는 부족한 사람인가 보다.” 이미 상처가 난 상태에서 스스로에게 또 하나의 상처를 더하는 셈이다.


반대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어떨까. 분명히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인데도 사람은 종종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쩔 수 없었어.” “상황이 그랬을 뿐이야.” 이때 필요한 것은 정직한 인정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그 순간에 자기비판 대신 자기합리화를 선택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스스로에게 항상 반대의 말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는 비난을 하고, 반성이 필요한 순간에는 변명을 한다. 어쩌면 인간은 타인의 평가에는 익숙하지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의 균형을 배우지 못한 채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한 가지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적절한 자기위로를 할 줄 아는 능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위로는 흔히 오해되듯 단순한 자기합리화가 아니다. 자기합리화는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언어다. 하지만 자기위로는 무너지는 자신을 잠시 붙잡기 위한 언어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방향이 다르다. 하나는 현실을 피하기 위한 말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말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부딪힌다. 실패를 겪고, 거절을 경험하고, 때로는 스스로에 대해 실망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인간이 정확한 자기평가만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단단하게 설계되어 있지 않다. 때로는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 그 순간에 필요한 것이 바로 자기위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가 실패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이미 결과로 인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잃은 상태일 것이다. 이때 스스로에게 “나는 왜 이렇게 무모할까.”라고 말한다면, 그는 앞으로 더 많은 시도를 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 “나는 무모한 사람이 아니라 도전적인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이 말이 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속이기 위한 말이라기보다 다시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말일 수 있다. 인간에게는 때때로 정확함보다 지속 가능성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은 중요한 태도다. 하지만 인간이 언제나 완벽하게 객관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미 상처를 입은 순간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 순간에까지 냉정한 평가만을 계속한다면 인간의 마음은 쉽게 지쳐버릴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또 하나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적절한 온도의 말을 건네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자기 자신과 함께 보내기 때문이다. 우리가 듣는 말 중 가장 많은 말은 사실 타인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반복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말의 성격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상태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적절한 자기위로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필요하다. 그것은 스스로를 무조건 좋게 평가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균형에 가깝다. 인간은 자신을 정확히 평가할 필요도 있지만 동시에 자신을 보호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비판은 배웠지만 자기위로는 배우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부족한 점을 고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더 잘해야 한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언어에 대해서는 별로 배우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자기비판이 아니라 더 정확한 자기위로일지도 모른다. 이미 충분히 상처받은 순간에 또 하나의 비난을 더하는 대신, 잠시 자신을 붙잡아 줄 수 있는 말을 건네는 것. 그것은 현실을 왜곡하는 일이 아니라 현실을 계속 살아가기 위한 작은 기술일 수 있다.


인간은 완벽하게 단단한 존재가 아니다. 때로는 부서지고, 때로는 위축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말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그 말을 해주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은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평가 속에서 살아가는 법은 배웠지만,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의식적으로라도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비난인가, 아니면 위로인가.


그리고 만약 위로라면, 우리는 그 말을 스스로에게도 건넬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적절한 자기위로, 그리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인간이 스스로에게 허락해야 하는 작은 기술일지도 모른다.


당신을 보듬어주는 위로는 타인으로부터만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가?

작가의 이전글메타인지를 메타인지 해야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