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의미를 삶으로 옮기는가?
우리는 종종 추상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 존중, 책임, 자유 같은 단어들은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이미 완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는, 넓고도 유연한 형태를 가진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 단어들을 사용할 때 일종의 안도감을 느낀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말한 것 같은 기분, 충분히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확신. 그러나 그 확신은 이상하리만치 쉽게 흔들린다. 그 단어들을 조금만 현실로 끌어내리는 순간, 그때부터 모든 것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지만,
“상대의 감정을 위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멈추는 것도 사랑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문장은 누군가에게 과도한 희생처럼 들린다.
“존중이 중요하다”는 말은 자연스럽지만,
“상대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개입하지 않는 것이 존중이다”라고 풀어내는 순간, 그것은 방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상한 감각을 경험한다. 분명 같은 개념인데, 왜 어떤 문장은 따뜻하게 느껴지고 어떤 문장은 냉소적으로 들리는가. 왜 추상적인 형태로 존재할 때는 아름답던 것들이, 현실의 문장으로 풀어지는 순간 차갑게 느껴지는가.
아마 그 이유는 추상이 가진 구조적 성질에 있을 것이다. 추상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워 둔 것이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형태를 고정하지 않음으로써 다양한 현실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한다. 다시 말해, 추상은 언제나 ‘가능성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가능성 속에서 각자에게 가장 덜 불편한 방식으로 의미를 채워 넣는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로 끌어오는 순간, 그 가능성은 하나의 형태로 고정된다. 더 이상 각자의 해석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의 선택과 행동으로 구체화된다. 이때부터 그 개념은 더 이상 모두에게 편안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문장을 냉소적이라고 느끼기보다, 사실은 그것이 너무 현실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밀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문제는 추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우리의 태도에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추상을 필요로 한다.
추상이 없다면 방향을 잃는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사라진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현실을 살아간다. 선택하고, 행동하고, 관계를 맺고, 책임을 진다. 이 모든 과정은 추상적인 상태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추상을 현실에 대입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입’이라는 말이 단순한 적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추상은 그대로 옮겨질 수 없다. 현실은 항상 불완전하고, 모순적이며,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추상을 현실에 맞게 변형하고, 때로는 훼손하고, 심지어는 포기하기도 해야 한다. 이것은 개념을 배신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살아 있게 만드는 방식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추상에 머무른다. 그들은 여전히 좋은 말들을 알고 있고, 그것을 믿고 있으며, 때로는 그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과정은 생략된다. 그 결과 그들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추상을 현실로 가져오려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깨지고, 예상치 못한 갈등이 생기며, 때로는 스스로의 신념과 충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정을 통해 조금씩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
이 차이는 특히 사랑과 같은 개념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랑은 가장 대표적인 추상이다. 그것은 누구나 이해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나 다른 의미를 가진다. “사랑하니까 함께한다”는 말은 자연스럽지만, “사랑하지만 결혼은 어렵다”는 말은 어딘가 모순처럼 들린다. 이때 흔히 나오는 질문이 있다. “사랑하는데 왜?”
이 질문은 사랑을 부정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너무 추상적인 상태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질문이다. 사랑은 시작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만으로 지속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감정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시간, 경제, 생활 방식, 갈등 해결 방식과 같은 수많은 요소들이 개입된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 포함될 수는 있지만, 그 단어만으로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사랑을 계속 느끼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사랑을 살아갈 형태로 만들 것인지. 이 선택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추상에 머무를 것인지 현실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상에 머무르는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순간에는 그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때때로 현실의 밀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영화나 책, 여행 속에서 우리는 추상을 다시 느낀다. 낭만, 여유, 의미 같은 것들을 현실의 조건 없이 경험한다. 이것은 도피가 아니라, 일종의 완충지대다. 그곳에서 우리는 소모된 감정을 회복하고, 다시 생각할 힘을 얻는다.
문제는 그곳에 얼마나 머무느냐이다.
완충지대는 머무르는 공간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충분히 쉬고 나왔다면,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얻은 추상들을 조금씩 삶에 적용해야 한다. 완벽하게 적용할 수는 없다. 항상 어딘가는 어긋나고, 부족하고,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그러나 그 과정 자체가 삶을 구성한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추상은 재료다. 현실은 조리 과정이다.
그리고 삶은 그 결과물이다.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좋은 요리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재료는 불에 태워야 하고, 어떤 것은 버려야 하며, 어떤 것은 원래의 형태와 전혀 다르게 변형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완벽한 형태는 반드시 깨진다. 그러나 그 깨짐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좋은 개념을 알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것을 언제 꺼내 쓰고, 어떻게 다루며, 어디까지 변형할 수 있는가이다.
추상만 붙잡고 있는 삶은 방향은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현실만 붙잡고 있는 삶은 움직이지만 방향을 잃는다. 결국 우리는 이 둘 사이를 오가야 한다.
추상에서 의미를 얻고, 현실에서 그것을 시험하고, 다시 추상으로 돌아와 정리하고, 다시 현실로 나아간다. 이 반복 속에서만 우리는 조금씩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삶이란 어쩌면, 완벽한 개념을 실현하는 과정이 아니라 불완전한 번역을 계속해서 시도하는 과정에 더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번역은 결코 완벽해질 수 없다. 항상 어딘가는 부족하고, 어딘가는 왜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시도한다. 왜냐하면 그 과정 속에서만 비로소 우리의 삶이 형태를 갖추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것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추상을 붙잡고 있는가,
그것을 현실 속에서 어디까지 끌어내리고 있는가.
혹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요리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재료만 바라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