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이 유행하는 시대

다정함을 다시 배우는 우리

by 이수염

다정함에 대해 글을 쓰다 보면 묘한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다정함에 관한 글들은 이미 충분히 많다. 책과 칼럼, 인터뷰와 강연, 짧은 문장들까지 곳곳에서 다정함이 이야기된다. 사람들은 다정한 태도를 말하고, 다정한 사람을 이야기하며, 다정한 문장을 공유한다. 어느 순간 다정함은 하나의 시대적 미덕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이 흐름 속에서 독자들의 관심도 적지 않다. 다정함에 관한 문장은 쉽게 공감을 얻고, 사람들은 그것을 삶의 태도처럼 받아들이기도 한다. 마치 우리가 지금 다정함을 다시 발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풍경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까지 다정함을 이야기하게 되었을까?

어떤 가치가 사회에서 갑자기 자주 언급되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그 가치가 풍부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결핍되기 시작했기 때문일 때가 많다. 정의가 흔들릴 때 정의를 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신뢰가 약해질 때 신뢰라는 단어가 반복되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다정함 역시 하나의 역설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다정함을 말한다. 다정함을 배우려 하고, 다정함을 삶의 태도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바로 그 열풍 속에서 우리는 동시에 어떤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그만큼 다정함으로부터 멀어져 왔다는 사실을.


다정함에 관한 책들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다. 그 중에는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라는 제목의 책도 있다. 그 책은 동물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실험한 결과들을 바탕으로 다정함이라는 특성을 설명한다. 공격성을 낮추고 협력하며 서로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어떻게 진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 장면은 조금 묘하다. 우리는 이제 다정함을 이해하기 위해 동물들을 바라본다. 인간 사회에서 다정함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행동을 참고한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아이러니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정함을 배우기 위해 다시 자연을 바라본다. 마치 우리가 한때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던 어떤 것을, 이제는 바깥에서 다시 발견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인간은 언제나 다정함과 함께 살아왔다. 인간보다 더 큰 사회를 만든 동물은 없다. 우리는 서로 협력하고, 서로를 신뢰하며, 서로의 도움을 통해 문명을 만들어왔다. 거대한 도시와 국가, 제도와 문화까지 인간 사회의 대부분은 협력이라는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다. 이렇게 보면 인간 사회 자체가 이미 다정함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서로를 완전히 불신하는 존재들이 거대한 사회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명은 경쟁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협력과 신뢰의 축적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다른 장면도 마주하고 있다.

인간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낸 동물이다. 그러나 그 거대한 구조 속에서 정작 인간다움의 중요한 요소들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서로 더 많이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졌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지만, 진심 어린 관계를 경험하는 일은 오히려 줄어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속도는 빨라졌고, 효율은 높아졌으며,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되고 평가되는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한 구조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기능적인 존재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능력으로 평가되고, 누군가는 성과로 설명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어떤 것들은 조금씩 뒤로 밀려난다.


다정함 역시 그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다정함은 또 다른 문제를 드러낸다. 우리는 다정함을 원하지만, 정작 다정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정함은 종종 하나의 이미지처럼 소비된다. 부드러운 말투, 상처 주지 않는 언어, 언제나 공감해 주는 태도 같은 것들이 다정함의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되기도 한다. 물론 그것들 역시 다정함의 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다정함은 그렇게 단순한 감정이나 태도만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다정함은 조용히 기다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다정함은 누군가에게 솔직한 말을 건네는 용기로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거리를 두는 선택이 다정함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위해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일이 다정함일 수도 있다. 다정함은 하나의 정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다정함을 하나의 이미지로만 이해하기 시작하면, 다정함의 많은 모습들은 점점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다. 다정함은 점점 더 단순하고 안전한 형태로만 소비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쩌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정함을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말들이 많아질수록 다정함의 얼굴은 오히려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 이것은 다정함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가 다정함을 이해하는 방식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왜 이렇게 다정함을 이야기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 것일까.

인간은 가장 거대한 사회를 만든 동물이다. 그러나 그 거대한 사회 속에서 인간은 때때로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인지 잊어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효율을 배우고 경쟁을 배우며 성공을 배우지만, 정작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충분히 배우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다정함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은 하나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것을 다시 찾으려는 움직임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정함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아직 우리가 다정함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다정한 사람을 좋아하고, 다정한 말을 기억하며, 다정한 행동에 감동한다. 어떤 친절한 태도 하나가 하루의 분위기를 바꾸기도 하고, 어떤 작은 배려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이 여전히 다정함을 알아볼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아직 우리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완벽하게 다정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정함을 알아볼 수 있고, 다정함을 기억할 수 있으며, 때로는 다정해지려고 노력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정함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정함을 다시 배우기 시작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질문은 결국 우리 각자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어떤 다정함을 알고 있으며, 어떤 다정함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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