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의 구조 셋, 해석

다정이 다정이 되는 순간

by 이수염

다정은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성격이나 태도로 부르지만, 다정은 언제나 여러 층위가 겹쳐져 만들어지는 하나의 사건에 가깝다. 어떤 것을 보고, 그것을 이해하고, 결국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 과정 속에서 다정은 비로소 모습을 갖는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다정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다정은 언제 다정이 되는가.

이 질문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가 분명 다정한 행동을 했음에도 그것이 다정으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특별한 의도가 없었던 행동이 오히려 깊은 다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같은 말, 같은 행동, 같은 장면이 어떤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무관심이 된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아마도 그 답은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이 통과하는 하나의 과정에 있다.


해석이다.

다정은 행해지는 순간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는 순간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행동은 어떤 의미로 번역되고, 그 번역된 의미가 우리의 감정이 된다. 누군가의 말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의도로 읽히고, 어떤 행동은 상황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다정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행위와 해석이 만나는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이 사실은 다정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다정은 한 사람의 의도로만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조언을 건넨다. 하지만 그 조언은 누군가에게 간섭처럼 느껴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조용히 곁에 있어 주는 방식으로 다정을 표현하지만, 그 침묵은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정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아무리 정확하게 표현하려 해도, 그것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는 통제할 수 없다. 다정은 보내는 사람의 손을 떠나는 순간부터 이미 다른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 영역에서 다정은 다시 한 번 선택된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해.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의 질문과 마주한다.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다정을 이해할 수 있는가.

다정의 형태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어떤 다정은 따뜻하게 다가오고, 어떤 다정은 거리를 두며 나타난다. 어떤 다정은 말로 표현되지만, 어떤 다정은 끝내 말해지지 않는다. 어떤 다정은 상대를 안아주지만, 어떤 다정은 상대를 밀어내기도 한다. 문제는 이 다양한 형태가

모두 동일하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이 익숙한 형태의 다정만을 알아본다. 말로 표현되는 위로에 익숙한 사람은 침묵 속의 다정을 잘 느끼지 못한다. 행동으로 드러나는 배려에 익숙한 사람은 거리 속에 담긴 존중을 놓치기 쉽다. 그래서 많은 다정은 존재했음에도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사라진다.

이것은 다정의 부재라기보다 다정의 미인식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다정의 다양한 형태를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가.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점점 더 해석의 기준을 단순화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점점 명확한 것을 선호한다.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 즉각적으로 감정이 전달되는 것, 설명 없이도 납득되는 것을 더 쉽게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다정 역시 점점 몇 가지 명확한 형태로 정리된다. 말로 표현된 위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공감, 누구에게나 이해 가능한 배려.


이것들은 분명 다정의 한 형태이지만, 동시에 다정을 하나의 틀로 고정시키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 틀에 맞지 않는 다정은 점점 다정으로 인식되지 않게 된다. 조용히 기다려 주는 시간, 굳이 개입하지 않는 거리, 때로는 불편할 수 있는 직설적인 말. 이런 것들은 다정일 수 있음에도 다정으로 읽히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이상한 장면을 보게 된다.

다정은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이 다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다정을 행하고도 다정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어떤 사람은 다정을 충분히 받고도 다정을 받지 못했다고 느낀다.

이 간극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다정의 부족이 아니라 해석의 한계에서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석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해 본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겪어 본 다정의 형태가 적을수록, 우리는 더 좁은 범위의 다정만을 알아본다. 그래서 다정은 개인의 감정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학습된 구조가 된다. 어떤 환경에서는 따뜻한 말만이 다정으로 인정되고, 어떤 환경에서는 조용한 행동이 더 큰 다정으로 여겨진다. 이 차이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다정을 경험해 왔는가의 문제다.


이렇게 보면 다정은 행위보다 훨씬 더 관계적이다.

다정은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해 완성된다. 그리고 그 완성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래서 다정은 언제나 어긋날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그 어긋남이 반드시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어긋남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다정의 형태를 배우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행동이 시간이 지나며 다른 의미로 보이기도 한다. 처음에는 차갑게 느껴졌던 태도가 나중에는 가장 깊은 배려였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이 순간 해석은 변한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다정은 다시 만들어진다.


그래서 다정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다정은 언제나 해석 속에서 움직인다. 우리는 같은 행동을 두고도 시간에 따라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경험에 따라 다른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다정은 단 한 번의 순간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반복되고, 수정되고, 다시 이해되며

조금씩 형태를 바꾼다.


이쯤에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다정은 언제 다정이 되는가. 그것은 누군가가 다정을 행하는 순간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그것을 다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일까. 혹은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천천히 만들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얼마나 많은 다정을 놓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다정을 오해하고 있는가. 어쩌면 다정의 역사는 다정이 사라진 이야기가 아니라 다정을 어떻게 해석해 왔는가에 대한

하나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다정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의 다정만을 받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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