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의 역사上

시대의 온도, 햇님과 바람

by 이수염

다정함에도 역사가 있다.


우리는 다정을 마치 본질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늘 시대의 온도에 따라 달라졌다.

어떤 시대에는 다정이 사치였고,

어떤 시대에는 다정이 무기였고,

어떤 시대에는 다정이 전략이었다.


나는 세상을 자연처럼 본다.


계절이 순환하듯,

권력도, 가치도, 미덕도 순환한다.

온도는 고정되지 않는다.

차가움이 길어지면 따뜻함을 갈망하게 되고,

따뜻함이 과해지면 단단함을 요구하게 된다.


다정함 역시

그 온도 속에서 형태를 바꿔왔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

햇님과 바람, 그리고 나그네.


바람은 외투를 벗기려 힘을 쓴다.

거세게 몰아붙이고,

더 세게 밀어붙인다.

그러나 나그네는 외투를 더 움켜쥔다.


햇님은 다르다.

그는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비춘다.

따뜻하게, 그러나 지속적으로.


결국 나그네는 스스로 외투를 벗는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다정함의 승리라고 배운다.


하지만 나는 늘 질문이 남았다.


그날이 혹한이었다면?

그 나그네가 이미 얼어붙어 있었다면?

그의 외투가 생존의 마지막 장치였다면?


그때 햇님의 따뜻함은

과연 충분했을까.


다정함은

언제나 승리하는가.



다정함의 역사는

승리의 기록이 아니다.


오히려 오해의 기록이다.


어떤 시대에는

단호함이 다정이었다.

어떤 시대에는

침묵이 다정이었다.

어떤 시대에는

거리를 두는 것이 다정이었다.


다정함은

고정된 태도가 아니라

온도에 대한 반응이었다.



차가운 시대를 생각해보자.


전쟁, 불안, 빈곤, 억압.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단단함을 미덕으로 삼는다.

강함이 존경받고,

냉정함이 리더십이 된다.


그때 다정함은

약함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 단단함은 상처를 남긴다.

과도한 바람은

나그네를 보호하지 못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햇님을 찾기 시작한다.


“이제는 조금 부드러워도 되지 않을까.”

“이제는 서로를 안아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따뜻한 시대가 열린다.



하지만 따뜻함이 오래 지속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온기가 당연해지고,

배려가 전제가 되고,

공감이 기본값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구조를 묻지 않는다.


따뜻한 말이 오가고,

따뜻한 제스처가 순환하고,

서로를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구조는 그대로다.


이때 다정함은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행위가 아니라 표면이 된다.



다정함의 역사는

온도의 균형을 잃을 때마다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차가움이 길어지면

다정은 해방이 된다.


따뜻함이 길어지면

다정은 장식이 된다.


그리고 장식이 된 다정은

누군가에게 유리한 구조를

조용히 유지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두 번째 장이 시작된다고 본다.


따뜻한 간신의 시대.



그러나 그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다루자.


지금은 배경만 기억하자.


다정함은 본질이 아니라

온도에 반응하는 역사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떤 온도 속에 있는가.


이 질문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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