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은 체념이 아니다

공허라는 중립지대 속 스위치

by 이수염

구조를 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다.


세상은 완전하지 않고,

사람은 생각보다 한정적이며,

나 역시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한 뒤에는

순진한 기대로 돌아갈 수 없다.


그 인식 이후에 찾아오는 것이 있다.


공허.


허탈함일 수도 있고,

힘이 빠지는 느낌일 수도 있고,

관계와 일과 자신에 대해 한 발 물러나게 되는 거리감일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이 공허를 실패로 착각한다.

마치 무너진 증거처럼 여긴다.

그러나 공허는 패배가 아니다.


공허는 중립지대다.


희망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다.

단지 이전의 기대가 수정되기 전의 공간이다.

감정이 가라앉고,

의미가 잠시 멈추고,

이전의 설계가 해체된 자리.


이 지점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지점은 성장의 통로다.


흔히 말하는 ‘고통 없이는 성장도 없다’는 말은

아마 이 구간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 공허를 통과하면 성장통이 되지만,

여기서 멈추면 냉소가 된다.


공허는 갈림길이다.


그리고 그 갈림길에서 우리는 두 방향을 마주한다.


체념.

혹은 조정.


겉으로 보면 둘은 닮아 있다.

기대를 줄이고,

거리를 두고,

감정을 덜 쓰려 한다.


하지만 그 내면은 전혀 다르다.


체념은 포기다.

더 이상 의지를 쓰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신의 에너지를 닫아버리는 일.


조정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의지를 쓰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그 안에서 나의 위치를 다시 설계하는 일.


체념은 닫힘이고,

조정은 수정이다.


이 둘은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서 갈린다.


바로, 공허라는 중립지대에서.


바닥을 친다고 해서

의지가 자동으로 생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의지는 꺾인다.


힘이 빠지고,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만하고 싶어지고,

덜 기대하고 싶어진다.


그 순간 의지를 낼지 말지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의지는 감정의 폭발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강해지는 것도 아니다.

의지는 선택이다.


공허 속에는 작은 스위치가 하나 있다.

켜질 수도 있고,

계속 꺼져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스위치는

열정이 아니라 구조에서 켜진다.


먼저 인정이 있다.


이 사람은 여기까지다.

이 구조는 이렇다.

나는 이런 한계를 가진다.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않는 태도.


인정은 패배가 아니다.

정보다.


그 다음은 책임이다.


이 구조 안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모든 책임을 떠안는 자책도 아니고,

모든 탓을 외부로 돌리는 회피도 아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분리하는 일.


그리고 마지막은 행동 하나다.


거창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작아야 한다.


더 이상 과하게 설명하지 않는 것.

반복되던 연락을 하루 늦춰보는 것.

한 번 거절해보는 것.

기대를 막연히 두지 않고 말로 꺼내보는 것.

지치기 전에 한 발 물러나는 것.


이 작은 행동이

의지의 스위치를 켠다.


조정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의지를 방향 전환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상대가 변하길’ 바라는 데 쓰였던 의지를,

이제는 ‘내 위치를 설계하는 데’ 쓰는 것.


이전에는

‘결과’에 매달리던 에너지를,

이제는 ‘태도’에 두는 것.


조정은 자기보호이면서도

자기보존이다.

기대를 재설계하면서도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의 결심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의지는 반복된다.


오늘 켰다고 해서

내일도 자동으로 켜져 있지 않다.

태도를 유지하려면

다시 인정하고,

다시 책임을 분리하고,

다시 행동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조정은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반복되는 의지 위에 세워진 방향성이다.


많은 사람들은 공허를 두려워한다.

그 자리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고,

이전의 확신은 무너져 있으며,

앞은 아직 설계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자리는 이미 중립이다.


당신은 이미 구조를 보았다.

이미 한 번 무너졌다.

이미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다.


스위치를 켤 것인가,

계속 꺼둘 것인가.


조정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일이 아니다.

강한 사람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저 공허 속에서

의지를 한 번 더 쓰기로 선택한 사람의 일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빠를수록 좋다.


왜냐하면 공허는 오래 머무를수록

냉소로 기울기 쉽기 때문이다.

의지를 미루는 동안

체념은 점점 자연스러워진다.


작은 행동 하나를 미루는 사이,

태도는 굳어버린다.


공허는 패배가 아니다.

그곳에는 작은 스위치가 있다.

인정에서 시작되고,

책임으로 방향을 잡고,

행동 하나로 켜지는 스위치.


당신은 이미 그 위치에 서 있다.


그렇다면,


지금 스위치를 켤 것인가.


그리고 켤 수 있다면,

왜 아직이어야 하는가.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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