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자연은 언제나 살갑지는 않다.
햇빛은 따뜻하지만 동시에 가뭄을 만들고,
비는 생명을 살리지만 홍수를 일으킨다.
질병은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재해는 준비된 자와 준비되지 않은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잔인해서가 아니라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무관심을 ‘부조리’라고 부른다.
왜일까.
아마도 우리는 기대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안전을 기대하고,
상호성을 기대하고,
노력의 정당한 보상을 기대한다.
관계에서는 배려가 순환하길 기대하고,
세상은 적어도 최소한의 합리성을 지니길 기대한다.
이 기대는 도덕의 산물이기 이전에 기질에 가깝다.
마치 숫사자에게 갈기가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미래를 가정하고 의미를 구성하려는 성향이 있다.
갈기가 풍성하든 성기든 그 존재가 사자가 아니게 되지는 않듯,
기대가 크든 작든 인간은 기대하는 존재다.
그래서 간극이 생긴다.
세계는 무관심하게 흘러가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다.
자연은 위험을 제공할 뿐인데,
우리는 그 위험에 ‘왜’라는 질문을 덧붙인다.
쥐떼가 자연재해를 맞닥뜨릴 때,
그들은 그것을 불공정이라 느끼지 않는다.
그저 위험으로 인식하고 반응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위험 앞에서 질문한다.
왜 나인가.
왜 지금인가.
왜 이렇게 반복되는가.
부조리는 세계의 결함이라기보다,
기대하는 존재가 감각하는 간극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대를 버려야 할까.
기대를 낮추는 것은 쉬운 전략처럼 보인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조금만 기대하고,
실망하지 않기 위해 미리 체념하는 방식.
그러나 기대를 낮추는 전략은 점점 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 끝에는 희망의 소거가 남는다.
기대를 없애는 것은
상처를 줄일 수는 있어도,
인간다움을 지우는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그래서 문제는 기대 그 자체가 아니라,
기대를 어디에 어떻게 두느냐에 있다.
기대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구조에 맞게 재배치하는 것.
그 재배치를 위해 우리는 먼저 구조를 보아야 한다.
세상의 구조는 큰 틀이다.
자연은 모든 생명에게 항상 호의적이지 않다.
사회는 완전하게 공정하지 않다.
관계는 자동으로 상호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 틀을 모른 채 기대를 걸면,
상처는 우연이 아니라 반복이 된다.
상대의 구조 또한 있다.
그는 어떤 한계를 가진 사람인가.
그의 배려는 어디까지가 자연스러운가.
그는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는가.
그의 침묵은 무관심인가, 회피인가, 능력의 한계인가.
상대를 모른 채 기대를 걸면
그 기대는 현실이 아니라 투사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의 구조가 있다.
나는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가.
나는 언제 소모되는가.
나는 어떤 관계에서 반복적으로 무리하는가.
나는 왜 특정한 유형에 끌리는가.
많은 오류는 여기서 시작된다.
자기 구조를 모르는 데서,
혹은 알면서도 부정하는 데서.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원래 책임감이 강해.”
“나는 배려하는 사람이야.”
“나는 이 정도는 괜찮아.”
그러나 낯선 구조와 처음 조우할 때,
우리는 비로소 모르는 나를 만나게 된다.
권력 차이가 존재하는 공간에서,
상호성이 약한 관계에서,
예상하지 못한 배신과 단절 앞에서.
그때 드러나는 반응은
우리가 알고 있던 성격의 목록을 넘어선다.
어떤 이는 회피한다.
상황을 탓하고, 구조를 보지 않으려 한다.
어떤 이는 자책한다.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고, 자신을 깎아내린다.
회피와 자책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구조를 전체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
회피는 외부로만 시선을 향하고,
자책은 내부로만 시선을 향한다.
그러나 조정은
외부와 내부를 동시에 바라보는 작업이다.
조정은 늦게 온다.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기 구조를 본다는 것은
내가 믿어온 나의 일부를 수정하는 일이다.
나는 헌신적인 사람이 아니라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라
버티는 데 익숙해진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이 깨달음은 불편하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회피하거나 자책한다.
하지만 조정은 다른 태도에서 시작된다.
용기로 출발하지만,
자기 혐오로는 지속될 수 없다.
자신을 덜 미워하려는 태도 속에서만
우리는 구조를 끝까지 바라볼 수 있다.
세상의 큰 틀을 인정하고,
상대의 특수성을 보고,
자기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
이 세 겹의 구조를 동시에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막연히 상처받는 존재가 아니라
조정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유지는 여기서 시작된다.
아직 해결은 아니다.
아직 완전한 위로도 아니다.
다만 하나의 전환점이다.
어쩌면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아직 구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계는 바뀌지 않을지 모른다.
상대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묻는다.
당신은
자신이 서 있는 구조를 알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