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이전에, 나라는 사람에 대하여

프롤로그

by 이수염

나는 처음부터 철학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며 살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늘, 어떤 선택 앞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무는 사람이었다.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고,

결정한 뒤에도 그 결정의 구조를 되짚는 쪽에 가까웠다.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왜 이 관계는 이 방향으로 흘러갔는지, 왜 나는 같은 지점에서 자주 흔들리는지.

이 질문들은 나를 특별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삶을 조금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괜찮다고. 다 지나간다고. 혹은 이게 맞는 방향이라고.

그 말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말들만으로 내 삶은 잘 작동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 뒤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남아 있지 않았고, 결론이라는 말 아래에서는 다시 같은 방식의 반복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보다 설명을, 결론보다 구조를

조금씩 더 갈망하게 되었다.


끝없이 고민하고 사유하다 보면,

결국 질문은 다시 “왜”’로 돌아온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괜찮다며 위로하고,

어떤 이들은 이렇다며 서둘러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렇게 위로와 결론 속에서 세상은 새로운 의미를 덧입고, 때로는 그 의미 때문에 오히려 변질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이 부조리하다면, 부조리한 그대로 그 안에 어떤 규칙이 존재하는지를 알고 싶다.


그 규칙을 아는 것이야말로 나, 혹은 ‘우리’라는 말로 묶여 있는 당신과 내가 어떤 구조 속에서 오래 유지될 수 있는지, 그리고 설령 유지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첫 단계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불처럼 사랑하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사랑해서 더 주고 싶고, 참아주고 싶고, 스스로를 조금쯤 희생하는 선택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느껴지는지도 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다른 질문 앞에 자주 멈춰 서게 되었다.


이렇게 사랑하다가 우리는 무엇으로 남을까?

사랑은 남는데, 사람이 사라지는 관계를 나는 정말 원하는 걸까.?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뜨거웠는지가 아니라, 사랑 이후에도 서로가 존재로 남아 있는가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지 않으며, 사랑하기 때문에 각자가 지켜야 할 몫을 남긴다.

이 태도는 차갑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사라지지 않기 위한 선택에 가깝다.


관계도, 구조도 비슷하다.

처음에는 늘 선의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모두가 옳은 말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는 더 이해하고, 누군가는 더 감내하고, 누군가는 계속 자신을 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인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이게 맞는 방향이잖아.”

“조금만 더 버티면 나아질 거야.”

나는 그 말들을 여러 번 나 자신에게 했고, 그만큼 여러 번 나를 소모시켰다. 그래서 이제는 관계를 볼 때도, 구조를 볼 때도 다음 질문을 먼저 던진다.


이건 누구를 살리고 있는가.

이건 무엇을 유지하기 위해 설계되었는가.

그리고 이 안에서 나는 여전히 남아 있는가.


내가 나만의 철학을 붙잡게 된 이유는 세상을 설명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나 자신을 끝없이 설득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 정도는 괜찮아.”

“다들 이렇게 살아.”

“네가 예민한 거야.”


이 말들로 나를 밀어붙이던 순간들이 내게는 가장 위험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보호하는 기준을 만들기 시작했다. 완벽한 이론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태도를.

그 과정에서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모든 철학에는 맹점이 있고, 그 맹점을 외면하는 순간

사람은 자신을 소모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이 책은 정답을 제시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한 기록이다. 그리고 혹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누군가가 있다면, 나누고 싶을 뿐이다.


나는 위로보다 기준을 남기고 싶은 사람이고,

결론보다 구조를 묻고 싶은 사람이며,

무너짐을 미화하기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한 방식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끝까지 남고 싶은 사람이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