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는 태양은 어떤은하계의 중심인가?

더 큰 순환을 만드는 나라는 구조

by 이수염

나는 하나의 구조고, 환경이고, 순환이다.

우리는 종종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말한다.

노력보다 배경이 중요하고, 성실보다 운이 앞서며, 진심보다 계산이 빠르게 보상받는 장면들을 본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묻는다. “이런 환경에서 개인의 의지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맞는 말이다. 구조는 강하다.

가난은 가난을 낳고, 폭력은 폭력을 낳고, 냉소는 냉소를 낳는다. 한 번 만들어진 순환은 스스로를 강화한다. 처음에는 하나의 선택이었지만, 반복되면 성향이 되고, 성향은 관계를 만들고, 관계는 환경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환경은 다시 개인을 규정한다. 이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더 이상 자유롭게 선택하는 존재라기보다, 이미 만들어진 구조 안에서 가능한 선택지만 고르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마치 늪과 같다.

처음 발을 디딜 때는 실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반복해서 밟히고, 물이 고이고, 흙이 풀어지면 그곳은 더 이상 단순한 땅이 아니다. 구조가 된다. 늪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여기서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환경은 누가 만드는가.

환경은 추상적인 괴물이 아니다.

환경은 개인들의 반복된 태도가 응축된 결과다. 누군가의 냉소가 쌓이고, 누군가의 방관이 이어지고, 누군가의 무책임이 반복되면서 하나의 공기가 만들어진다. 그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그 안에 들어가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결국 구조는 ‘나와 무관한 외부’가 아니라, 수많은 ‘나’들의 집합이다. 이 지점에서 생각은 다시 개인으로 돌아온다.


굴레가 완전히 형성되기 전까지는 개인의 힘이 비교적 크게 작용한다. 그러나 구조가 만들어진 이후에는 환경의 힘이 더 세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거대한 시스템을 한 번에 바꾸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구조가 형성되는 최소 단위, 즉 개인의 반복은 여전히 우리의 손 안에 있다. 나는 세상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반복을 통해 선택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사람’은 도덕 교과서적인 완전함이 아니다. 한 번도 화내지 않는 사람,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화를 내고, 지치고, 퇴보하고, 때로는 비겁해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방향성이다.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존중을 반복하는 사람,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려는 사람, 신뢰를 쉽게 버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반복이 쌓이면 그것은 성격이 아니라 하나의 분위기가 된다. 그리고 분위기는 사람을 끌어당긴다. 인간은 자신을 안전하게 만드는 리듬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비난이 가득한 공간에는 비난이 모이고, 냉소가 가득한 곳에는 냉소가 남는다. 반대로 성실이 많은 곳에는 성실이, 진심이 머무는 곳에는 진심이 남는다. 이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비슷한 진동수는 서로를 강화한다.


내가 하나의 선순환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미세한 생태계가 된다. 나의 해석, 나의 반응, 나의 태도가 반복되면 그 주위에 작은 구조가 형성된다. 그 구조 안에서는 일정한 규칙이 작동한다. 함부로 말하지 않는 분위기, 쉽게 포기하지 않는 리듬, 무너져도 다시 시도하는 태도 같은 것들. 물론 퇴보는 존재한다. 선순환은 직선이 아니라 파동이다.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전진했다가 후퇴한다. 하지만 방향이 유지된다면, 전체의 궤적은 여전히 앞으로 향한다. 순환은 반복이지만, 반복은 축적을 낳는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구조는 전염된다.

나쁜 구조도, 좋은 구조도 전염된다. 냉소는 빠르게 번지고, 책임감도 조용히 확산된다. 그래서 개인의 태도는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다. 내가 선택한 말 한마디, 내가 멈춘 반응 하나가 미세한 방향을 바꾼다. 그리고 그 방향은 시간이 지나며 가속한다.

돈이 돈을 벌듯이, 태도는 태도를 낳는다. 내가 계속해서 신뢰를 선택하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남는다. 내가 계속해서 비난을 선택하면, 비난에 익숙한 사람들만 곁에 남는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이다. 사람은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공기 속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묻게 된다. 나는 어떤 공기를 만들고 있는가.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하다. 거대한 시스템은 여전히 불공평하다. 그러나 그 부조리 속에서도 나는 하나의 작은 구조를 만들 수 있다. 나라는 단위에서 시작되는 반복이 모이면, 그것은 하나의 환경이 된다. 그리고 그 환경은 다시 나를 강화한다. 처음에는 의지가 필요하다.

지속적인, 때로는 고집스러운 의지.

늪에서 빠져나오려면 안에서 버티는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힘은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외부의 손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의 말, 누군가의 존재, 누군가의 다른 리듬이 우리를 끌어올린다. 흥미로운 것은 그 외부의 손도 또 다른 개인의 반복에서 만들어진 구조라는 점이다.


누군가는 이미 선순환이 되어 있었기에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손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개인의 책임은 무겁다. 나는 나 하나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외부의 힘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늪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이 될 수도 있다. 이 깨달음은 거창하지 않다. 오히려 소박하다. 세상을 구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하루를 다르게 반복하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오늘 한 번 덜 비난하고, 한 번 더 이해하려 하고,

한 번 더 책임지려는 태도. 이 작은 선택들이 모여 나를 하나의 구조로 만든다. 그리고 그 구조는 주변을 바꾼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나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하지만 나의 삶에서는 내가 중심이다. 그 중심이 흔들리면 주변도 흔들린다.

그 중심이 단단해지면 주변도 안정된다. 결국 질문은 이것으로 수렴한다.


나는 어떤 순환이 될 것인가.

나는 어떤 구조가 될 것인가.


선순환은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는다. 의도와 반복이 필요하다. 그리고 실패를 견디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방향을 유지하면, 그 주변에는 같은 방향의 사람들이 남는다. 그렇게 한 명, 두 명이 모이면 작은 생태계가 형성된다. 세상이 거대하다는 이유로 나는 아무것도 아닐 필요는 없다.


나는 하나의 구조이면서, 하나의 환경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늪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단단한 땅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선택한다. 완벽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반복하기 위해서. 순환하듯이. 그러나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진동으로.


당신은 지금 어떤 환경과 중심이 되어있나?

그리고 어떤 순환을 만들어 내고 있나?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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