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일의 의미

혼삶과 함께 재정의 한 '일'의 의미

20년을 넘게 일을 해왔다. 이혼을 하기 전이나 이혼을 한 후에나 일을 했다. 쉬었던 적이 없었기에 지난 20여 년의 내 인생의 마일스톤이 새겨지는 동안 일은 계속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혼 후 일의 의미가 조금 더 해졌다. 

모든 이혼을 한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분열된 각각의 가정을 꾸려가려면 소득이 필요하고, 많은 경우 일이 고정소득의 원천이 된다. 가장 쉽게 말해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일을 해야 한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그러나 그 이외에도 일의 의미가 좀 더 각별해지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내게는 이혼, 결혼, 출산 등등과 상관없이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아가 있다. 대학졸업 후 쉬지 않고 일을 했으니 20년이 된 나의 커리어는 엄마, 배우자 등등의 정체성과 같이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중요하다. 결혼은 이혼으로 종결되었지만 그래도 일은 계속해왔다는 자부심이 있다. 결혼생활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때가 종종 있었지만 일은 약속한 만큼을 하면 약속한 월급을 주고 그 이상으로 잘하면 보너스도 주고 승진도 시켜줬다. 결혼생활은 내게 묘한 패배감을 줬지만 일을 그렇지 않았다. 둘을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지만 한 때 일이 배우자와 결혼생활보다 낫다, 더 공정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이혼이라는 '타격'을 통해 작아진 자아가 다른 곳에서 여전히 성취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다른 인간관계와 사회적 의미를 이어갈 수 있는 장이기 때에 나 일하고는 이혼하지 않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이혼 과정의 소용돌이에 있을 때에는 일은 굉장한 스트레스다. (물론 '일'은 원래도 스트레스다. 세상에 일이 취미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개인사의 전쟁이 오가는 중에도 성과는 내야 하는 곳이 일터이기 때문에 더러는 이 두 전쟁사이에서 일을 쉬거나 그만두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나는 지켜냈고, 앞으로도 여러 현실적, 이상적 무슨 이유에서든 지켜내야만 하는 것이 일이 된다. 

일상적인 이유에서도 의미가 각별하다. 어리고 오만했던 시절에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 여겼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연결을 필요로 한다. 서로 주고받아야 하고, 인간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그 첫 번째 인간관계가 사실 가족이다. 특히 한 집에서 같이 사는 식구들. 그러나 덩그러니 혼삶을 살게 된 나는 일터에 나가지 않는 날은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말을 안 할 수도 있지 그게 무슨 대수인가라고 처음에는 생각하였으나 그로부터 2-3여 년을 지나 이혼 후 혼삶에 있어 나의 인간관계, 특히 일을 하면서 만나는 무수한 인터랙션들이 나를 지켜내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터에서의 인간관계는 좋기보다는 성과를 위한 논쟁, 기싸움, 불편함 감정을 이겨내야 하는 극기까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인간관계마저도 이혼 후 혼삶을 살면서 스스로의 고립감을 이겨내는데 도움이 된다. 씩씩 거라며 화를 삭이는 시간도, 절망하여 낙담하여 있는 때도 적어도 고립되어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상황에 비해서는 낫다는 것을 혼삶 6년 차인 지금의 중간 결론이다. 괴로운 것이 종종 절절히 고독한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것.

처음에는 나 일로라도 미친 듯이 성공하고 싶어. 더 하고 싶어, 더 잘하고 싶어의 욕심이 과했다. 이혼이라는 상처를 사회적 성공이라는 보상으로 makeup 하고 싶은 어린 마음이 있었었나 보다. 아이가 보고 싶을 때, 내 개인사가 왜 이렇게 되었지 지난날의 아픈 상처가 마음을 후비어 팔 때 이메일에 회신을 하고, 새로운 미팅을 잡고, 출장을 다니며 그 시간을 이겨내려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또 필요한 시간들이 가고 나면 적절하고 현실적인 욕망과 그에 대한 노력이 남는다. 그리고 감사하게 된다. 내게 일이 있음을.. 이혼이라는 상실, 아이를 내가 데리고 있지 못하다는 죄책감과 고독감. 나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휩쓰는 날에도 내가 꾸준히, 이어서 하고 있는 다른 것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