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차 아프리카 여행사 대표가 떠난 다시 새로운 아프리카
20년 3월. 코로나가 닥쳤고, 아프리카로 가는 길이 막혔다. 환불업무를 마무리하고 나니 북적이던 하루가 텅 비었다.그리고 나는 땅을 샀다.
타라의 흙을 움켜쥐며 "그래도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에 빙의하여.
털어놓자면, 나는 평소 여행업에 대한 회의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일은 중개업이라는 것.
그 무엇도 내 것이 아니기에 내 의지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라 생각했었고, 그 한계성을 보완할 무언가를 찾아 때때로 배회하곤 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내겐 땅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상황이 아무리 달라져도, 땅에서 나고 자라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며
나는 이 실재하는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면 된다! 는 마음으로.
땅은 여행사를 운영하며 늘 변수와 상황에 대응해야 했던 내게 안정과 휴식으로 느껴졌다.
코로나로 인해 세상은 계속 시끄러웠지만,
나는 사람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는 곳, 바다 가까운 산 속에 터를 잡고 고라니 멧돼지 너구리와 어우렁더우렁 지냈다.
지하수를 파서 물이 쏟아지던 날 , 이제 더이상 군민체육센터에서 씻지 않아도 되는구나 기뻐했고
전봇대를 심어 전기가 들어오던 날, 깜깜한 산속에 쏟아지던 그 밝은 불빛에 눈이 머는게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다.
내친김에 집도 직접 지어보자며, 5톤짜리 포크레인을 사고 용접기술도 배워 6평짜리 자그마한 오두막을 지었다.자재랑 장비 사는 김에 평소 로망이었던 유리온실도 같이 만들었다.
용접을 조금 할 줄 알게되면서 세상을 대하는 생각이 심플해졌다. 잘라서 녹여붙이면 뭐든지 완성되었다. 고민할 시간에 움직이는 게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사람이 계절의 변화를 피하고 잠들고 씻고 살아가는 공간이 괴발새발 그린 그림 한 장과 몇가지의 재료 (철, 스티로폼, 본드)를 합쳐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웠다.
이 곳은 분주하고 느슨하며 긍지와 절망이 교차하는, 흥미롭고 버거운 또 여느 세상이었다.
그러나 지는 해가 몰고오는 성그런 공기와 한낮의 따뜻한 공기가 뒤섞일 때,
그 찰나에 느껴지는 뜨겁고 뭉글한 공기 속에서도 나는 아프리카를 찾았다.
조그마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영화 '아웃오브 아프리카'의 메인테마, 모짜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이
온실 골조의 용접부를 갈아내는 그라인더의 날카로운 굉음에 섞여들려올때,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아 손을 멈추었다.
해질녘 세상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시간, 떠나는 해가 페인트칠 마감이 덜 된 각관에 비쳐 오팔색으로 반짝일 때
나는 아프리카 초원이 오후 다섯시에 내어주던 그 옅은 물기의 흔적을 느끼려 숨을 크게 쉬었다.
다시 아프리카에 안겨 부비고 싶었다. 아프리카가 그리웠다.
여행사는 일이 맞다. 견디고 해결하고 달성해야하는.
그래서 가끔은 헷갈렸다. 아프리카로 향하는 이유에 대해서.
아프리카 여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너무 단순해서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정도다.
아프리카를 좋아했고, 계속 가고 싶었고, 합당하게 가고 싶었다.
아프리카를 내 삶에서 놓아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찾아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런걸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사실 '아프리카'와 '여행사'는 끝없는 신경전 중 이었던거다.
어쨌든, 나는 아프리카로 가야했다.
나에겐 비슷한 역사가 있었다. 2014년 서아프리카에 에볼라가 발병하여 여행 예약의 90%이상이 취소되었을 때, 나는 아프리카로 떠났다. 또 단순병이 도져서, 지금 아프리카는 텅텅비어서 여행하기 좋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6개월정도 아프리카를 홀가분하게 여행했다. 작고 성능이 심하게 딸리는 차, 애증의 피아트 Panda 를 빌려 아프리카를 5만km정도 구석구석 운전했다. 이 작고 귀여운 판다는 잠비아에선 모래길에 빠져 알낳는 거북이처럼 허우적대었고, 길을 가던 건장한 동네 흑인 친구들 4명이 번쩍 들어올려주어 겨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느날 밤은 보츠와나 마운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갑자기 겅중겅중 튀어나온 기린을 피하려다 도로 옆 고목 옆에 고꾸라질뻔하기도 했다. 심지어 그 고목은 어둠 속에서 커다란 귀를 펄럭였고 시동이 빨리 걸리지 않는 판다를 재촉하며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보츠와나의 어느 도로에서 코끼리를 만나는 건 유별난 일이 아니지만, 귀를 펄럭이는 화난 코끼리는 유별나다. 아참, 그러고보니 코끼리에게 밟혀 죽을뻔한 적도 있다. 가봉의 루앙고 국립공원에서였는데.
이것봐. 나는 지금 신나고 들떠서 아프리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몇번이나 웃음을 참았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가야겠다.
살아오는 수많은 순간들 중에, 이러한 감정은 흔하지 않다.
움직이기로 했다. 언제나 그렇듯 합당하게.
코로나의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가장 극심하고 고통스럽던 21년 봄.
아프리카 8개국을 40여일씩이나 함께 다녀왔던 일주여행 손님들께 조심스럽게 연락을 해보았다.
여행사 초창기때 뵙고 한 번도 연락이 닿지 않았던 분들도 계셨고, 아프리카를 다녀오신지 2년이 채 안된 분들께도.
함께 다시 아프리카에 가지 않으시겠냐고.
즉시 여섯 분이 흔쾌히 답을 하셨다.
' 너가 가자면 나는 무조건 가'
이렇게 모두가 집 밖으로 나서는 것 조차, 사람을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상황에서
몇 년만에 드린 연락에, 심지어 아프리카를 가자는 미친 소리를 하는 내게
들려주신 이 전화 너머의 목소리를 아마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지금 여행에 가는 건 어렵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모두 오랜만에 걸려온 내 전화를 즐겁고 반갑게 받아주셨다. 염려하고 응원해주셨다. 전화마다 한참을 아프리카에서의 추억을 되새기며 함께 신나했다. 그렇게 며칠동안 비슷한 이야기를 수없이 나누었지만 , 지치지않고 지겹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기운이 차올랐다.
그리고 곧 또다른 10명의 팀까지 모였다.
기쁘고 먹먹했다.
'아프리카 여행사'
내게는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어쩌면 늘 있었는데, 몰랐다.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는 기쁨. 그것만으로도 지금 내겐 충분하다.
이것으로 여행사와 아프리카는 완벽히 화해했고
나는 홀가분하게 다시 아프리카로 떠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