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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정민 Oct 09. 2015

#1. 장 보러 가는 길이 여행이 된다면

여행 이야기: 스페인어를 배우다가 문득 깨달은 삶의 태도에 관하여

 스페인어에는 viajar 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travel, 즉 '여행하다'라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동사가 가끔씩은 '그냥 어디어디 목적지까지 가다' 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즉 해외여행을 갈때도 viajar고, 시장에 간다 할때도 조금은 어색할지라도 viajar를 쓸 수 있다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난 우체국으로 간다" 라는 말을 "우체국으로 여행을 간다" 로 어거지 치환이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 

(* 물론 보통 어디를 가다 라고 말할 경우엔 ir - 영어로 치면 go라는 동사가 훠얼씬 많이 쓰입니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평소에 막연하게 생각만 하던 것들이 단번에 딱 정리가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렇지. 굳이 일상과 여행을 구분 짓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캐리어에 배낭에 바리바리 짐을 싸고 선글라스를 쓰고 비행기를 타는 것 만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입고 집에서 나와 볼일을 보고 동네를 산책 다니는 그 순간들도 여행처럼 느껴진다면 얼마나 인생이 풍요로울까요?  



  우리 나라 젊은이라면 아마 열에 아홉은 들어봤을 말 중에 '까르페 디엠 Carpe Die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라틴어 주제에 너무 유명한 말이라 누군가의 카톡 알림말에 '까르페 디엠' 이라고 써있는 걸 본다면 오히려 '이야 소울 좀 없는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 입니다. 그렇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이 말은 진짜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중고를 졸업하는데 12년이 걸렸어요. 인생이 80정도까지라고 치면 이제 그 과정을 여섯 일곱 번만 반복하면 끝이란 이야기죠. 그것도 병이나 사고가 없을 정도로 적당히 운이 따라줘야지 가능합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는 것처럼 삶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셈 입니다.


  그래서인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를 앞서간 멋진 사람들은, 우리에게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슬퍼하는 대신 그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즐겨라고 충고해주곤 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어떤 기자가 톨스토이와 인터뷰를 하면서 "지금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그는 "나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사람은 당신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인터뷰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야 엄청나지 않나요? 이게 아마 '까르페 디엠' 의 본질적인 메세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핫플레이스 가서 사진 찍고 "주말이 가는게 아쉬워 #즐기자 #힐링 #까르페디엠" 이라고 인스타그램에 올릴때만 쓰는 말은 아닌 셈입니다. 


 '까르페 디엠'은 라틴어. 고대 지중해 지역의 언어라죠? 그쪽 지방, 즉 그리스나 이탈리아, 뭐 프랑스 남부 이런 데 사는 사람들은 눈을 뜨면 푸른색 바다가 보이고 햇살이 내리쬐는 따사로운 환경을 매일 접하고 산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지중해로 여행을 가서 우와~ 하는 감탄이 그들에게는 생활인 셈이겠죠. 그런 환경에서 몇 세대를 걸쳐 살아오다 보니 그 친구들의 DNA에는 그 특유의 낙천스러움과 생에 대한 만족감이 자연스럽게 배어들었나 봐요. 그러니 까르페 디엠이라는 말이 그들에게서 나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끝나가는 생을 아쉬워하며 즐겨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채, 자꾸 더 새로운 자극을 찾지만 말고 널려있는 주변의 일상들을 좀 더 감동스럽게 바라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렇게 일상을 여행처럼 느끼는 것이 곧 까르페 디엠이고,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사는 방법이 아닐까 해요. 사실 아직 좀 어렵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한번이라도 하고 났더니 저도 일상이 아주 약간이나마 더 즐거워졌습니다. 


# 덧붙여, 일상을 여행처럼 느끼게 해주는 BGM을 하나 소개합니다.

이런 풍의 곡들을 들으면서 바깥에 나가면, 꼭 내 눈앞에 펼쳐진 익숙한 풍경들이 마치 영화 프레임 안의 순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곤 하더라구요.

Benny Goodman - If I had you


#

꼴랑 스페인 단어 하나 배워놓고 엄청난 깨달음이랍시고 줄줄 썼죠?
그러고 보니 저 단어를 배울 때까지만 해도 진짜 제가 스페인으로 떠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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