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의 다른 이름, 적절한 사회적 가면의 필요성
적어도 희망을 잃진 않기를,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랑둥이 포도리입니다. 내 이웃·우리 사회의 특징적인 결, 일상생활 속 인사이트, 내 마음 돌보는 법을 기록하고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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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나는 알레르기 반응이 일만큼 이 단어에 대한 혐오가 있었다.
나의 생존과 타인의 몰락을 위해 머리를 맞대어야만 하는 업계(?), '좋은 일이니까'라는 명분으로 제도를 악용하며 진짜 좋은 일을 하고 있는 동종업계에 해를 끼치는 좋은 일 하는 조직. 이 들을 목격하기도 하고, 그 속에서 일을 해오기도 했다. 업무 상 만나게 된 외국인이 통역관과 (내가 알아듣지 못할 줄 알고) 자국어로 내 나라, 모국인(상사)에 대한 편향적이기 짝이 없는 험담을 면전에서 듣기도 했다.
꽤 어린 시절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겪은 적지 않은 충격들로 인해, 적어도 나는 가짜의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지 말아야 지란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고, '앞에서 못할 말 뒤에서 하지 말자'란 말을 내 마음을 지키는 방패로 두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 일상생활이 조금은 어색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상황을 늘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려 했다. 화가 나면 이게 화가 날 상황인지를 분석하는데 집중했고, 그 사람의 입장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다. 실제로도 일정 부분 납득이 되면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건 그냥 참는 것이었다. 참으니 몸이 아팠다. 마음이 몸을 통해 신호를 보낸 걸 느꼈을 때, '아 이 감정을 배출해내야 하는 건가'라는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관계에서도 어색한 부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험담에서도 비합리적인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동조하지 않고 빠지려고 했다. 그 상황이 너무 불편했다. 그러다 보니, 되려 '갑분싸'가 되는 상황들을 종종 마주하게 되었다. 그래도, 꼭 어울리기 위해 동조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러다 평소와는 다르게 바라보게 된 계기가 생겼다. 심리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부터 였다. 사람들의 마음을 돌보고, 살피는 일을 하는 바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의 미래상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동료들의 험담을 하기도 하고 화와 짜증을 마구 내기도 하는, 그냥 대단히 멋진 가면을 가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에 실망 해갈 때쯤, 그들의 아픔과 트라우마들을 알게 되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품고 있었다. '아, 이 사람들 버거운 삶을 가면으로 덮고, 타인을 치유하며 돌보며 그렇게 살고 있구나. 나의 부정적인 감정이 공적인 영역에서 새어 나오지 않게, 그렇게 끊임없는 노력으로 흘려보내고 자정 하는 거구나.'
그들은 모두 그 사실과 상황에 대해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소위 험담이라 하는) 감정을 쏟고 나면 그 감정에 대한 영혼 없는, 혹은 무조건적인 동조나 공감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그 감정에 대한 존중을 표했고, 그 감정 자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리스너(듣는 이)는 한바탕 감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휩쓸려간, 놓쳐버린 다른 감정의 조각들을 주워주며 스스로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들을 당시엔 '저게 가능하다고..?'라는 놀라움이 들 정도로 너무나 일상적인 표현과 대화로 이루어지는 치유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웠던 점은 그 이야기의 주인공 당사자 앞에선 늘 존중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상생의 페르소나. 이걸 말하는 거구나.
눈앞에 산재되어 있는 일들을 무사히 처리하는 것이 우리가 회사에서 할 일이라 하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감정의 문제가 일과 관계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가 수 없이 많다는 것이다. 일 처리 능력보다 사회성이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는 경우도 태반이다. 누구는 너무 감정적이라는 이유로, 누구는 너무 목표지향적인 일벌레라는 이유로 생기는 크고 작은 불만들이 쌓여 전체를 덮는 화가 된다. 업무와 사회성(생활)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회사, 사회는 누구에겐 매일 비위 맞추는 수고를 하는 곳이 되기도, 누구에겐 삭막하고 마음 둘 곳 없는 외로운 공간이 되기도 한다. 업무를 진행하는 것임에도, 관계 맺음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기저에는 내가 한 일의 수고로움을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공감을 원하는 마음이 깔려있다. 그래서 스쳐 지나가는 작은 불만들이 쌓이고 쌓여 수면 위로 떠오를 때 즈음이면, 이미 내 안의 편견과 화는 단단한 성벽이 되어 있으니까.
내 감정이 다른 영역에서 폭발하지 않도록 가면을 갈아 끼우는 것은 심리적 에너지가 상당히 소모되는 일이다.
특히 학부모, 학생, 동료 교사 등 직장의 한 공간에서 다양한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교사와 같은 직업은 더더욱 그렇다. 꾹꾹 눌러 담은 마음은 언제 터져 흘러나올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어떤 상황인지, 내 '동료'가 어떤 상황인지 인지하고 존중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때론 '나'를 위한다는 상대의 진심 담긴 묵직한 한마디보다 거리감 있는 존중이 더 따뜻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이유다.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이 달라진다고 하던가. 세대, 직급 등 많은 갈등은 모두가 서로를 어디에 서있는지 중히 여기지 않아서, 괘념치 않아서 시작된다. 나를 위해서, 우리의 관계 맺음이 건강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오염된 물을 적당히 흘러 보내어 정화시켜야 한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게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페르소나는 '예의'와 '존중'의 다른 표현이 될 수 있으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건강한 관계 맺음의 지속을 위해 적당한 가면은 필수적이다. 내가 페르소나에 치를 떤 것은, 어쩌면 '가면'을 '가식'과 동일시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원체 '그냥 그런 사람이 있구나'하고 넘기는 성격이라, 한동안 험담(?)이라고 느껴지는 대화 속 '공감'과 '동조' 그 사이 어딘가에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질 것이다. 그 중심을 찾아나가고 잡아가는 것은 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