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생각하며
"오빠, 나는 왜 어릴 때 엄마 기억이 없어?"
어느 날 막내 오빠와 통화하면서 갑자기 어린 시절의 내게, 어머니의 기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물었다.
"옛날에 아버지가 중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계실 때, 아버지가 학교에서 배구 선수들을 키웠어. 그런데 그
옛날에 선수들 키우려면 공 있어야지, 유니폼, 운동화, 스타킹 있어야지. 학생들이 돈이 어딨어? 밥도 못 먹는 시절에.
아버지의 월급을 선수들 키우는 데 다 털어 넣었어.
대회에 나가려는데, 선수들의 유니폼까지는 맞추었는데 신발을 못 산거야. 그래서 맨발로 대회에 나가서
배구를 해. 부여군에서 우승하고, 충청도에서 우승했단 말이야.
그 얘기가 교과서에도 실리고, 동아일보에도 실렸다. '맨발의 배구 선수들'이라고.
아버지의 얘기를 내가 교과서에서 배웠어.
아버지가 생활비를 안 주는 거야. 그래서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와서 바느질을 했다.
어머니가 바느질 솜씨가 대단하잖아. 아버지가 마작을 하다 담뱃불로 옷에 빵꾸를 내오면 엄마는 짜깁기를 해서 감쪽같이 꿰맸어. 어머니가 짜깁기도 잘했다.
서울에 낙원시장에 바느질 가게에 점원으로 들어가. 가게를 운영했던 것도 아냐. 한복 기술자로 들어갔어."
오빠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는지.
"우리 어머니가 기생의 옷을 만들었단다. 우리 어머니가."
마지막에는 비통한 듯 내뱉었다.
어린 시절의 내겐 그렇게 어머니가 없었다. 10살 많은 언니가 나를 키우기 위해 학교를 1년 쉬었다는 말을 들을 때도 예전에는 흔한 일쯤으로 생각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어머니처럼 꼬인 인생도 없다.
어릴 적부터 붓글씨를 잘 쓰고, 바느질 뜨개질 양장까지 손으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잘했다.
신문을 읽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던 분이었다.
요즘 같으면 무어라도 되셨을 분인데, 시대를 잘못 만나 피어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머니를 아는 사람들
기억 속에 솜씨가 아까운 분으로 남겨 있을 뿐이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어머니가 가정적인 남편을 만났더라면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