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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구오 Feb 06. 2023

나홀로 군산 I

나를 잊은 채로 떠가는 구름처럼

       정리되지 못한 감정들은 때를 놓치면 병으로 번진다. 나는 그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지금 그 순간 떠나야했다. 군대에 있는 동안 즐겼던 내 취미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기행문을 읽는 것이었다. 읽으면서 나도 언젠간 그들처럼 여행지에서 하루를 정리하며 글을 쓸 수 있길. 그 설렘을 온전히 느끼고 기록할 수 있길, 하고 바랐다. 여유가 생겼다고 아무데나 떠날 용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엔 나도 나의 상태를 읽을 수 있었다. 떠나야지만 채울 수 있는 구멍이 생겼다. 여행이 필요한 순간이 돌아온 것이다. 명목과 시간은 있고, 그럼 목적지가 필요했다. 군산으로 여행지를 정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21살 때 홀로 떠난 첫 여행지였던 담양이 오래 기억에 남았고, 그래서 전라도로 또 가고 싶었다. 둘째로는 그냥 난이도가 낮아서. 주요 관광지가 구도심에 몰려 있어서 차가 필요 없었고, 다 둘러보기에도 1박 2일이면 충분해보였다. 마음 먹은 순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버스표와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버스에서의 3시간은 꽤 상쾌했다. 나는 약간 버스 체질이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혼자만의 여행이기에 여러 생각에 잠겨 그 순간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그리고 미리 저장해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봤다. 군산은 해당 영화의 촬영지였기 때문이다. 한 4년만에 다시 보게 된 영화였다. 아 내가 저 동네로 떠나는구나, 정원이의 마지막 사랑이 살던 그 동네로.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다는 주옥같은 명대사가 흘러나오며 영화가 끝났을 때, 버스도 때마침 터미널에 도착했다. 여유로운 시작이었다.



       고군산군도는 군산 여행자들이 많이들 들리는 섬이라길래, 터미널에서 나와 그 곳으로 곧장 향했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되고, 시간도 1시간이나 넘게 걸리는 곳이었지만 설렘 때문인지 아무런 부담도 느껴지지 않았다. 첫 목적지인 선유도해수욕장에 내린 순간, 코 끝에서 물씬 바다 향기가 느껴졌다. 아... 산의 남자가 바다의 공기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겨울 바다는 꽤 찼지만 너무 많은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를 식히기에 딱 적당한 온도였다. 해변에는 플로깅 단체가 와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은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 더미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바닥에 쓰레기 버려본 경험 無.) 어쨌든 이런 쌀쌀한 날씨에 섬으로 와서 봉사를 하는 그들을 대단하게 생각했다. 그들이 있기에 나 같은 사람들이 이렇게 깨끗한 관광지도 구경하고 있는 거니까.



       나는 좀 더 걸어서 장자도로 넘어가기로 했다. 지도 어플 상 도보로 30분 정도 걸린다고 떴다. 만약 누군가와 함께 여행 중이었고, 그 사람이 걷는 것을 싫어한다면 분명 버스나 택시를 타자고 징징거릴 만한 거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나 혼자 여행 중이었기에 고민은 필요 없었다. 이 여행은 걷다가 죽기로 계획된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애인이나 친구 불문하고 걷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 아무튼, 바람에 의해 쇳소리 같은 게 나는 공포스러운 다리를 건너자 장자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여기나 저기나 별 다를 바가 없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쭉 걸어서 바로 옆인 대장도로 갔다. 그 곳에는 대장봉이라는 멋진 전망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낮아보이는 외관과는 다르게 대장봉은 호락호락한 코스가 아니었다. 일단 크로스백 두개와 나름 거대한 렌즈가 달린 카메라, 그리고 청바지를 장착한 나는 누가 봐도 트래킹과 어울리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리고 우중충한 날씨 때문인지 등산로도 꽤 미끄러웠다. 마음 속으로 이 상태로 등반하려는 것은 욕심이 아니었나, 내려가야 할까...하는 순간, 정장을 입고 하산하는 세 형제를 마주쳤다. 음. 그리고 그냥 닥치고 마저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사실 전망대까지는 20분 정도 걸리는 아주 짧은 코스인지라 겁 먹을 필요는 없다. 전망대 위에서 내려다본 경관은 아주 아름다웠다. 사실 이 곳은 일몰 맛집이라던데, 혼자 해질 때까지 이 곳에 있는 것은 아니할 짓이라 땀을 식히고 잠시 머물다 내려왔다.



       매시간 정해진 타임에 버스가 오기 때문에 맞춰 정류장으로 향했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분께 말해둔 입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과 환승 지옥에 치이는 상황이었지만 괜찮았다. 그때의 나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새로운 사람과 대화할 로망에 사로잡혀 있었. 술이나 유흥 같은 것들에 몸서리를 치는 나인지라 파티 게하? 그딴  선택지에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 이해 관계도 없는,  그대로 이방인과 스몰토크할 기회는 이런 여행에서만 주어지는 특혜가 아닌가. 그렇게 도착하여 객실을 안내받았다. 4인용 도미토리지만 오늘   명이 예약했다고 했고, 내가 먼저 도착했으니 아무 자리나 골라 짐을 놓고 나왔다.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시간도 많겠다 그 동네를 좀 산책하기로 했다. 정처없이 걷다보니 월명공원이 나왔다. 사람도 한 명 없는, 멧돼지나 영적인 존재가 튀어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비주얼이었지만 그냥 길 따라 걸어 올라갔다. 저 멀리 보이는 수시탑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귀신을 마주치면 나중에 한명씩 돌아가면서 괴담썰 풀기 할 때 좋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있었다. 애초에 믿지도 않는 귀신이 나올리는 없었고, 아주 거대한 수시탑 아래 서서 월명동의 야경을 내려다 봤다.



       그리고 바다 건너 멀리 보이는 저 반짝이는 건물이 무엇인지 너무 궁금했다. 이 시간에 저렇게 화려하게? 구글 맵을 켜봤지만 그 건물이 무엇인지 통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 아, 나는 영원히 저 곳에 갈 수 없겠다. 우리는 100년을 살아도 우리가 밟고 있는 이 행성은 커녕, 이 좁은 한반도도 전부 누벼보지 못한다. 아마 만년을 살아도 그렇게 못할 거다. 그러면서 다른 행성에 닿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라니. 뭔가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어차피 이 지구에 태어난 모든 존재가 언젠간 죽고 사라질 영혼이라면, 우리는 하나 가진 이 육신으로 이 지구라도 더 열심히 탐방해봐야 하지 않을까. 뭐, 그런 잡생각을 했다.



       산에서 내려와 다시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가는 길에 그 곳을 마주쳤다. 바로 '초원사진관'. 입 밖으로 우와~ 하는 소리가 나왔다. 심은하가 몇날 며칠을 서성이던 그 길목에 내가 서있었다. 원래 내일 낮에 올 생각이었지만, 사람 한 명 없어보이길래 이때다 싶어서 그냥 들어갔다. 안내원 아주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영화를 어떻게 봤냐면서 신기해 하셨다. 영화를 보고 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장소에 대한 감흥이 다를 것이라고. 맞는 말이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소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곳곳에 놓인 영화 스틸컷들과 옛 군산 시민들의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초원사진관 앞에는 정원이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 그리고 다림의 주차 단속 차량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 근방 어딘가에서 그들이 튀어나와 각자의 하루를 보내려 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 근처에는 그들이 아이스크림을 함께 나눠먹던 가로수까지 재현되어 있었다.



       20시 반 쯤, 숙소로 돌아왔는데... 같은 방을 쓰는 분 (*이하 소대장님. 이유는 다음 화에서 설명하겠다.)은 이미 주무시고 계셨다. 난 나름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주무시다니. 아니, 그리고 내 스몰토크 로망은? 생각해보니 이건 개멍청한 로망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단 자는 사람 방해 말고 씻기나 하자 싶어서, 짐을 챙겨 나오면서 불을 꺼드렸다. 소대장님은 어느새 깨셔서 불 켜놔도 된다고 했지만, 그냥 괜찮다고 하고 나왔다.


       씻고 돌아오니 이미 그 분은 우렁찬 소리로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계셨다. 나는 그가 다이나믹한 코골이꾼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나도 만성 비염 환자인지라, 만만치 않게 코를 고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나면 맞후임이 내 전역복에 "이제 이섭배 병장님 코고는 소리 안들어서 다행입니다."라고 쓸 정도였다. 하하. 미안했다 친구야... 암튼 예민한 사람과 함께 방을 썼다면 불편했을 거 같은데 오히려 좋았다. 나는 소대장님과 대화해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잠을 청했다. 푹신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잠자리에 익숙해져가는, 이 낯설고 오묘한 기분을 느끼며.


'나홀로 군산 II'에서 계속됩니다. 과연 소대장님과 얘기를 나눴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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