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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후 Aug 22. 2022

습관적 불안과 완벽주의

 요즘 들어 글을 쓰는 것이 점점 어렵게만 느껴진다. 생각의 흐름대로 문장을 잇고 장면을 묘사하며, 사건을 풀어나가다가 쿵! 하고 결말에 다다르는 과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쓰고 싶은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내 능력으로는 아직 다다를 수 없는 곳만 바라보며 무력해지는 것이기도 하겠다. 생각이 많아지면 문장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돌부리에 걸리듯 턱턱 걸리기 마련이고,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나서도 글 전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많아진다. 근래에 글이 뜸해지는 것도 그 이유이다. 책 한 권의 무모함에서 벗어나더니 완벽주의와 무력함이라는 수렁에 빠진 것이다.


 오늘 새벽에는 잠이 오질 않아서 이런 고민들을 길게 늘여 놓았다. 문장 문장 이어지다가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던 걱정은 먼 산을 넘어 외딴곳으로 향했다. 달만 검은 바다에 둥둥 떠있는 해변가를 지나 비좁은 골목도 보였다. 두 장이 넘어갈 무렵에 다다라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찢어냈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중학교 즈음, 많이 늦지만 공부한다는 것을 인지한 시점부터 나는 노트를 자주 찢었다. 호기롭게 새로운 노트를 열고 날짜와 제목을 적은 뒤에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손으로 쥐어뜯은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단추부터 마음에 들지 않으니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가도 계속 신경이 쓰였고, 여차저차 세 번째 페이지로 넘어가도 한 부분이 삐끗하면 그동안 써온 것들을 모조리 뜯어내기 일쑤였다. 왼손으로는 노트 겉표지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몇 장을 부여잡은 뒤에 바깥으로 잡아당기면 종이에 베이는 것만큼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그 습관은 한동안 지속되어서 찢어진 흉터가 노트의 절반을 넘기도 했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채로 말이다.

 물론 모종의 이유로 찢지 못한 노트들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들은 찢어진 자국이다. 그 습관은 대학에 가서도 나를 괴롭히며 노트를 사는 데에 적잖은 돈을 쓰도록 만들었다.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두 장 정도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노트를 쓰기 시작하거나 낱장으로 써서 파일철에 고정시키는 노트도 사용해보곤 했다. 찰나의 효과는 분명했으나 그것이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그 뜻은 결국 찢는 습관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찢어진 종이들은 너저분한 측면에서 작은 가루들을 흘린다. 커터칼이나 가위로 없앨 수 없는 흔적도 노트에 남는다. 책갈피가 없는 데에도 항상 그 자리가 펴지거나 눈에 띄게 표시가 나는 것이다. 오늘 새벽 적힌 것들 때문인지 종이조각은 무거웠다. 새벽에 쓴 글이라 그런 것일까? 되도록이면 아침과 낮에 A4 두 장 정도의 글을 쓰고 운동을 마친 저녁에는 항상 고치기만 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밤에 쓴 글은 밤을 닮기 마련이니까.

 그중 일부는 이러했다.




 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수업>에서는 수줍은 성격 자체도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도서관에서 발견한 뒤부터 마음을 사로잡아 이내 주문해서 도착한 책. “나한테는 숨길 수 없을걸!” 하며 이미 알고 있었지만 덮어두었던 문제를 들춰내는 것들이 나는 좋았다. 적나라하게 꿰뚫어 보는 시선은 섬뜩하기도 하지만 매력적이기도 하니까. 나 자신을 무너트릴 만큼의 치부만 건들지 않는다면, 내 이해를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리고 내 모습과 닮았다면 나는 한 사람으로서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 소유할 수 없지만 귀 기울이고 졸졸 따라가다가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게 된다는 뜻이다.

 그것이 정답이라서? 아니다. 정답이 무엇인지, 애초에 질문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를 이해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충분히 가능하지만 아니다.

 일종의 경외심, 위대한 철학자를 비롯해서 과학자들과 스님들과 공부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20대 초반 시절 봤던 타로가 떠올랐다. 다른 친구와 시답잖은 연애점을 보러 갔다가 마지막 질문으로 던진 것이었다. “제가 누군지 알고 싶어요.” 고민 많은 눈으로 점 봐주는 아주머니를 영악하게 괴롭힌 순간, 그녀는 작은 테이블을 가득 채우는 호로 카드를 펼치고는 단 한 장을 고르라고 말했다. 나는 그중에서 Hermit을 뽑았다. 회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그보다 검은 안개 사이에서 작은 랜턴 하나에 의지한 모습. 나중에 알아보니 한 일에만 빠져들며 주변을 살피지 않는 것이나 수행에 매진하고 혼자서 몰두하는 것처럼 해석되는 카드였다.

 동시에 모호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심리검사 결과지를 이용한 실험이 떠올랐다. 한 무리의 피실험자에게 의도적으로 동일한 결과지를 주면서 개별적인 결과라 나눠주고는 그 반응을 확인한 것인데 모두가 자신에게 정확히 들어맞는다고 말한 결과였다. 당시에는 사주나 관상부터 타로와 모든 운세가 그런 것들에 기반하는 서비스업과 다르지 않다고 치부했고 지금도 유효하다. 결국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말장난에 불과하니까.




 다시금 <작가수업>을 폈다. 두근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는 불안은 적당한 단어와 말을 찾지 못해서 여전히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말과 생각들도 결국 그런 것들이 아닐까?

 도러시아 브랜디는 이중적 자아와 꾸준하게 쓰기 위한 ‘주문’을 소개해준다. 말이 주문이지 그냥 훈련법에 지나지 않지만,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라 하더라도 대부분은 형편없는 초고를 써서 고치고 비슷한 나날을 반복하며 작업을 한다고 일러준다. 그리고 일단 훈련해서 익숙해지라고 말한다. 일정한 시간에 항상 글을 쓸 것, 자아를 분리해서 훈련시킬 것 등등. 직업으로 받아들이고 익숙해지고 나면 점차 나아질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문학적 재능만이 글을 쓰는 것을 결정하진 않는다고, 특별한 몇몇 작가를 제외한다면 누구나 단번에 완벽한 글을 쓸 수는 없다고. 당연한 과정이며 인내심을 가지라고 말한다.


 나는 꾸깃꾸깃 뭉쳤던 종이들을 쓰레기통에서 꺼내어 다시 펼쳤다. 쓰는 데에 15분은 족히 넘은 데다가 다시 보니 분량도 적지 않았다. 빳빳하게 펴서 원래의 자리, 찢어낸 노트의 상처에 끼워 넣었다. 이미 틈은 메워지지 않을 정도로 어그러져 있었다. 대신 책갈피를 겸하는 작은 메모로는 쓸 수 있겠다. 시간이 지나서 새살이 돋아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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