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구멍을 채우는 법

250508 종교현상학 - 김재영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by 김희우

인간은 본질적으로 '구멍 난' 존재이며, 그 결핍은 자신과의 분리, 타인과의 소외, 그리고 삶의 궁극적 근거로부터의 단절로 나타난다. 이 분리는 단순히 행동의 문제가 아닌, 존재론적 차원에서 비롯된 심원한 실존적 조건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취약함과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이는 종종 자기 부정과 증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심지어 위대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조차도 환자를 만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고, 환자의 치유 과정에서 자기 자신 또한 깊은 자기 수용의 경험을 마주했음을 시사한다. 이는 인간의 치유가 단순히 외부의 개입을 넘어선 내면의 통합 과정임을 방증한다.



인간 존재는 수평적인 관계망 속에서 조건적이고 제한적인 유대감을 형성하는 동시에, 궁극적 차원이라는 수직적인 관계를 지향한다. 우리가 맺는 수평적 관계가 본질적으로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진정한 치유는 조건적인 차원에서 무조건적인 차원으로의 전이(transition)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는 개인이 집단의 맹목적인 요구를 넘어설 때 비로소 진정한 주체로 설 수 있듯이, 유한한 관계를 넘어선 존재론적 수용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폴 틸리히는 마르틴 루터의 "은총" 사상에서 그 통찰의 핵심을 발견한다. 루터에게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나 지적 분투의 결과물이 아니라, 오직 은총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는 인간의 의지가 스스로를 향해 굽어져 있으며(self-curved),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 손상을 치유할 수 없다는 루터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는 죄를 단순히 도덕적 행위의 문제가 아닌,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적 차원까지 스며든 존재론적 분리로 보았다. 루터가 신비주의적 사랑론과 달리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적대감마저도 솔직하게 인식했듯이, 그는 인간의 무의식적 죄책감을 깊이 파고든 선구적인 심리학자였다. 루터에게 "어떻게 자비로운 하나님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절규는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었으며, 이는 결국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자격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이 '의롭다 선언(칭의)'해 주시는 은총에 의거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틸리히는 루터의 이러한 은총 개념이 현대 심리치료, 특히 인간주의적, 실존주의적 접근과 깊이 연결된다고 역설한다. 전통적인 교회 제도나 교리에서 간과되었던 '은총 체험'이, 근대 이후 심리치료 현장에서 "수용(acceptance)"이라는 개념으로 재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틸리히에게 죄는 '분리(estrangement)'라는 보완적 용어로 이해된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타인, 그리고 궁극적 근거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보편적 운명을 지니며, 동시에 이러한 분리를 스스로 선택하고 심화시키는 데 능동적으로 가담하기도 한다. 은총은 바로 이러한 분리와 소외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주어지는 것이다. 거절된 존재가 받아들여지고, 죄책감이 용기로 전환되며, 분리되었던 생명과 생명이 재결합하고, 자아가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것이 바로 은총의 본질이다. 이는 우리가 이미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받아들이는(accepting our acceptance)' 과정이 기독교 신앙의 심장부임을 의미한다.



틸리히는 심리치료의 경험이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넘어, 우리 안에 형성된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까지 변화시킬 잠재력을 지닌다고 보았다. 전통적으로 멀리서 요구만 하는 엄격한 '아버지' 이미지를 넘어,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우리와 가까이하는 '어머니' 이미지, 즉 우리를 받아들이고 지지하는 신관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가 비판했던 '위협적인 아버지' 이미지를 수정하고, 프로테스탄트 전통에서 부족했던 여성적 요소를 하나님의 관념 속에 다시 도입하는 중요한 변화를 의미한다. 심리치료는 인간의 깊은 내면적 갈등과 죄책감을 다루면서, 궁극적으로 신적 수용의 경험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칼 로저스와 롤로 메이의 견해는 틸리히의 통찰에 더해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킨다. 로저스는 인간의 모든 파괴성이 성장 욕구가 좌절된 왜곡물이며, 인간 대 인간의 공감적이고 무조건적인 수용을 통해 인간의 실현 경향이 회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틸리히가 자기 긍정이 일어나기 전에 타인에게 수용받는 경험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틸리히에게 데모닉(demonic)*은 개인의 의지를 넘어 인간 내면과 사회 구조 전체에 작용하는 초개인적 힘으로서, 창조성과 파괴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론적 불안의 발현이다. 롤로 메이는 데모닉이 결코 제거될 수 없는 존재론적 불안으로 인해 우리 심층 심리 내에 언제나 '활성 옵션'으로 남아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노력이나 타인의 수용만으로는 근본적인 치유가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데모닉(demonic) : 개인의 의지를 넘어 인간 내면과 사회 구조 전체에 작용하는 초개인적 힘. 창조성과 파괴성을 동시에 지니는 모호한 구조이자 궁극적으로는 파괴적 결과를 낳기 쉬움



궁극적으로 틸리히는 로저스가 제시한 '대인관계적 은총'이나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이 인간 소외 극복에 필수적임을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자기 수용은 단순히 수평적인 관계를 넘어선 초월적 수용, 즉 궁극적 차원에서의 '이미 받아들여짐'을 공유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수평적 차원뿐 아니라,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실재를 향한 '수직적 차원'을 동시에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이 죄책감만큼이나 의미 상실로 고민하는 시대에, '나의 수용을 수용하는 것'은 단순한 심리적 위안을 넘어선 깊은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불완전함, 약점, 심지어 내면에 숨겨진 어두운 면모까지도 궁극적 차원에서 이미 수용되었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용기를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삶의 교차로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우리에게, '무엇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은총의 경험은 우리가 이미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내면화하게 하여, 존재의 분리를 넘어 통합으로 나아가고 삶의 모든 차원에서 온전한 치유를 경험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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