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뿐인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250609 심층심리학 - 김재영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by 김희우

자기 인식에서 성찰을 거쳐 인류애에 이르는 여정은 겉보기엔 단순하고 논리적인 과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여정은 어떠한 의지나 지적 통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깊은 고통과 갈등을 수반하는 실존적 체험으로 살아내야만 한다. 진정한 깨달음은 이론이 아니라 살아낸 통증의 과정이며, 참된 자기 인식과 사회 변화는 고통스러운 심연을 통과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과정은 이성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과의 대면, 해체, 고립, 그리고 새로운 질서의 탄생을 포함하는 영적인 통과의례에 가깝다.



우리는 오랜 시간 외부의 시선과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가며 내면의 깊이를 잃어버렸다. 기독교가 인간의 어두운 절반, 즉 그림자를 부정해 온 결과 내면에서 심리적 왜곡이 생겨났듯, 현대 사회는 자기기만과 표면적인 행복 추구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상실하고 있다. 내향적인 지식인은 깊은 통찰을 제공하지만 실천적 삶에 기여하지 못하고, 외향적인 사람들은 진정한 자기 성찰 없이 '좋은 것'을 흉내 내며 자기 것인 양 주장하지만, 그 내면은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 이렇듯 선과 진리는 외부에서 빌려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통과하면서 체득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진정한 영성이다.



1937년 칼 융은 예일대학교 테리 강좌에서 심리학과 종교에 대한 자신의 깊은 통찰을 펼쳤다. 그는 심리적인 '황금'─자기(Self)를 만들어내는 연금술적 과정을 강조하며, 이는 외면적인 물질의 변화를 넘어선 내면의 통합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연금술사가 화학 물질을 다루듯, 구두 수선공 야콥 뵈메가 구두를 만들듯, 모든 전문가는 각자의 작업을 통해 자기 안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이처럼 모든 현상은 경험적인 것이며, 그 경험은 살아있는 경험이어야 한다. 연금술사는 연금술을 통해, 구두장이는 구두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자기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으로의 여정은 반드시 자신을 향한 깊은 신뢰, 즉 ‘믿음(faith)’를 필요로 한다. 이 믿음이 없다면 그 어떤 경험도 진정으로 살아있을 수 없다. 융은 이것을 ‘종교적 사실(religious fact)’이라 불렀다.



아돌프 켈러는 융의 통찰을 통해 종교가 단순히 신학적 사변이 아니라, '분리된 것을 다시 연결한다'는 릴리가르(religare)의 의미처럼 의식이 무의식 안으로 들어가고, 궁극적으로는 그 심연과 맞닿아 자기 자신을 새롭게 확장하고 깊어지게 하는 행위라고 이해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기 안의 심연을 탐험하며 심리적인 황금, 즉 자기(Self)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며, 그 안에서 새로운 통찰과 영감을 얻는 것을 뜻한다. 루터가 '누구나 다 제사장'이라고 외쳤듯이,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내면으로 들어가 심리적 연금술을 통해 가장 거룩한 일을 이룩할 수 있다. 융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그 자체로 상징화되어 우리 내면으로 들어가 심리적 연금술을 만들어내는 재료가 된다. 그런 삶이 바로 종교적인 삶이며, 이는 비유적으로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고,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 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변증법(dialectic)’은 무엇인가? 변증법은 서로 대립하는 두 요소의 긴장 속에서 더 깊은 진리나 실존이 '불완전하게' 그러나 강하게 드러나는 방식이다. 융은 이 세상 모든 일이 종교적 사실이며, 변증법적으로 끝없이 내 의식이 내면으로, 심연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 끊임없는 대면과 재구축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더 깊이 알아나가고, 인생살이 전체가 의식과 무의식의 결혼 생활과 같다고 보았다. 때로는 이혼을 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며, 순례를 중단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끊임없는 여정 자체가 바로 종교적 사실이다.



바르트와 같은 신학자들도 결국 연금술사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재료, 즉 '말씀'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융은 바르트가 그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엄청난 상상, 새로운 영감, 계시적인 사건들을 제한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융의 능동적 상상(active imagination)은 내면의 상징적 재료들을 가지고 심연으로 들어가 상상의 세계를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트의 신학은 말씀이라는 재료를 통해 깊이 들어가지만, 거기서 일어날 수 있는 능동적 상상을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켈러가 바르트를 두둔하려 했을 때 융이 미소 지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융은 바르트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상징, 상상력, 무의식과의 깊은 대면을 의도적으로 제한한다고 보았다. 켈러는 이를 순수한 신앙으로 해석했으나, 융에게는 그것이 진정한 내면의 연금술로 이어지지 못하는 한계로 비쳤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상징이 될 수 있다. 이 상징들을 우리의 내면으로 받아들여 깊이 성찰할 때, 우리는 마치 연금술사가 비천한 물질을 귀한 금으로 바꾸듯, 우리 자신을 더욱 성숙하고 의미 있는 존재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렇게 삶의 모든 순간을 통해 내면의 성장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바로 진정으로 종교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융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단순히 신학적인 논쟁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차가운 이성뿐 아니라 따뜻한 마음과 직관으로 삶을 바라보고, 타인과의 상호 조우(mutual encounter)를 통해 서로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는 겉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편리함만을 좇는 동안, 정작 내면의 깊이와 실존적인 체험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버렸다. 특히 한국 사회가 지금 겪는 어려움은 바로 이러한 잃어버린 깊이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 문을 다시 열고, 고통과 갈등 속에서도 진정한 자기와 대면하며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내는 영혼의 연금술을 시작해야 할 때다. 이 여정이야말로 현시대에 가장 절실한 통찰이며, 우리 각자의 삶을 종교적인 사실로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 모든 현상을 거룩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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