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라이어마허 vs 루돌프 오토

250912 한국 그리스도교의 이해(1)

by 김희우

합리와 감정의 경계, 슐라이어마허의 질문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지성이나 도덕의 영역에서 해방시키려 했다. 그에게 종교는 신학적 교리나 윤리적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절대적인 것에 대한 감각' 혹은 '무한자에 대한 직관과 느낌'이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 유한함 속에서 문득 무한한 존재를 예감하고 직관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숭고한 예술 작품 앞에서, 혹은 사랑하는 이의 눈빛 속에서 우리는 이성적 분석이 불가능한 어떤 '떨림'을 느낀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종교는 바로 이 감수성과 직관의 영역이었다.


그는 신을 세상 밖에 고립된 존재로 보지 않았다. 신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 즉 '삼라만상' 속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초월하는 근원이다. 무한한 존재는 순수한 추상적 개념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유한한 존재 안에서만 포착된다. 슐라이어마허는 이러한 감각적 직관을 통해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신과 만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사유는 종교를 인간 내면의 심오한 체험으로 환원시키며, 우리가 흔히 '신비 체험'이라 부르는 현상의 근원을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두려움과 매혹, 루돌프 오토의 '성스러움'

루돌프 오토는 슐라이어마허의 사유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종교의 본질을 '성스러움(the holy)'이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정의했다. 그에게 성스러움은 어떤 합리적 논리나 윤리적 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비합리적' 속성이었다.


오토는 성스러움의 본질을 '누미노스(the numinous)'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누미노스는 '신성(divine)'과 달리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 힘을 의미한다. 인간이 이 누미노스에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감정은 단순히 긍정적이거나 평화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두렵고도(tremendum) 매혹적인(fascinans) 신비(mysterium)'이다.

누미노스는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힘으로, 그 앞에서 인간은 자신이 티끌 같은 존재임을 깨닫는 '피조물 감정(creature-feeling)'을 느낀다. 이 두려움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압도적인 위대함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이다. 동시에 그 힘은 우리를 끌어당기는 강렬한 매혹을 지닌다. 지옥과 종말, 심판의 개념이 종교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도 바로 이 '두려운 신비'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은 생명을 주는 동시에 파괴하는 양면성을 지닌다. 힌두교의 시바신이 파괴와 동시에 새로운 탄생을 상징하는 것처럼, 성스러움은 양 극단의 에너지를 내포한다.

오토의 사유는 종교의 비합리적이고 원초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에게 종교적 경험은 논리적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신비이며 압도적인 힘에 대한 체험이다. 이러한 관점은 지성을 앞세운 합리주의 시대에 간과되었던 종교의 본질적인 힘을 재조명한다.




두 학자의 차이

(슐라이어마허는 1834년에 세상을 떠났고, 루돌프 오토는 1869년에 태어났다.)

루돌프 오토는 이러한 슐라이어마허의 '합리적' 종교 이해에 반기를 들었다. 오토는 종교의 핵심이 슐라이어마허가 강조한 '절대의존감정'과는 다른,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으로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성스러움(the holy)'에 있다고 주장했다. 오토에게 성스러움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를 초월하는, 근본적으로 '비합리적(non-rational)'인 속성을 지닌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낯섦'과 '두려움':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는 인간이 신을 안정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면, 오토의 종교는 인간이 미지의 절대적 존재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tremendum)'과 '낯섦(mysterium)'이었다. 신을 경험한다는 것은 편안하고 평화로운 감정이 아니라, 압도적인 힘에 대한 공포와 동시에 매혹을 느끼는 '양가적인' 경험이었다. 이것은 마치 거대한 폭풍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경외감과 유사하다. 그저 아름답거나 평화로운 풍경이 아닌,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압도적인 장관인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종교관은 이 근본적인 '두려운 신비'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했다.

환원 불가능성: 슐라이어마허는 종교적 경험을 인간의 심리나 감정으로 환원해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오토는 종교의 본질인 '누미노스(the numinous)'를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독자적인' 실체로 보았다. 누미노스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정의하거나 분석할 수 없는 초월적 힘이며, 종교는 바로 이 누미노스를 경험하는 것이다. 오토는 인간이 이 누미노스를 마주했을 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피조물 감정(creature-feeling)'이 종교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즉 오토의 비판은 슐라이어마허의 관점이 종교의 신비적이고 압도적인 측면, 즉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영역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으며, 이는 종교가 가진 근본적인 '낯섦'과 '두려움'을 간과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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