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신을 다르게 만나는가

250912 한국 그리스도교의 이해(2)

by 김희우

이 시대는 너무나 명료해졌다. 복잡한 문제는 알고리즘이 해결하고, 알 수 없는 현상은 과학이 해명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지만,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은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미스터리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깊은 슬픔, 그리고 예상치 못한 깨달음처럼 말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이성만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이 글은 깊이 있는 종교 및 철학 사상들을 바탕으로, 우리가 흔히 **‘종교적 경험’**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서로 다른 종교를 이해하기 어려운지를 명확하고 쉽게 통찰하려 한다. 이는 종교를 넘어선, 우리 자신의 삶과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선이 될 것이다.


진리는 '찾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

옛사람들은 진리라는 것이 세상 어딘가에 숨겨져 있고, 우리가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보물찾기처럼 말이다. 그러나 근대 철학은 이 생각을 뒤집었다. 그들은 진리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경험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모든 것이 인간이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종교적 경험을 이해하는 두 가지 큰 관점이 생겨났다.


1. 첫 번째 관점: '같은 물, 다른 그릇'

경험-해석 모델, 현상학적 접근, 본질주의(essentialism)

이 관점은 모든 종교의 근본적인 경험은 사실상 동일하다고 본다. 불교의 깨달음, 이슬람교의 알라,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모두 초월적인 어떤 실체에 대한 경험이며, 그 경험 자체는 보편적인 '성스러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루돌프 오토가 주장한 누미노제라는 개념과도 연결된다. 오토는 인간이 종교적 대상 앞에서 느끼는 압도적인 두려움(tremedum)과 동시에 강렬한 매혹(fascinans)이라는 감정은 언어와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쉽게 말해, 종교적 경험은 ‘같은 물’인데, 이를 설명하는 언어와 문화, 상징은 ‘다른 그릇’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서로 다른 종교들이 공통의 근원을 가졌다고 보며, 종교 간의 대화와 상호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2. 두 번째 관점: '그릇이 곧 물을 만든다'

언어-문화 모델, 문화언어학적 접근, 구성주의(constructivism)

이 관점은 앞의 모델에 반대한다. 경험은 이미 언어와 문화라는 그릇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한(恨)'이라는 감정은 단순히 영어로 번역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합일'이라는 경험과 불교의 '공(空)'에 대한 경험은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가 다르기에 그 내용과 깊이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종교의 다양성을 강조하며, 모든 종교를 하나의 틀로 단순화하는 것을 경계한다.


'무서운 신'과 '사랑의 신'의 충돌이 말하는 것

오랜 세월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율법의 하나님'으로 이해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죄와 불순종에 대해 엄격하게 심판하는 존재였으며, 이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을 통해 강화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와 다른 신의 얼굴을 제시했다. 그는 병든 자를 고치고 죄인을 용서하며, 무자비한 심판 대신 끝없는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었다. 마치 그 행위는 하나님이 그들을 병들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상이한 신관(神觀)은 예수 사후 유대인들이 겪게 되는 디아스포라(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뿔뿔이 흩어진 유랑 생활) 이후, 더욱 복잡한 논쟁을 낳았다. 일부 유대교 신자들은 디아스포라를 '야훼의 벌'로 해석하며 기존의 신관을 고수했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하나님'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찾았다.



또 다른 신관 논쟁으로,

1. 아리우스파 논쟁은 4세기 초기 기독교를 뒤흔든 교리 논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아리우스의 주장: 아리우스는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첫 번째 피조물이며, 따라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등하지 않고 하위 존재라고 주장했다. 이는 철저한 유일신 사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아타나시우스의 반박: 아타나시우스는 예수가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완전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구원은 온전한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결과: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의 주장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성자가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2. 유대교에서는 삼위일체 비판 : 위대한 유일신을 셋으로 쪼개서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비판



이처럼 동일한 신에 대한 경험일지라도, 그 경험을 '징벌'로 해석하느냐 '사랑'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종교의 본질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종교는 '경험' 그 자체와, 그 경험을 언어와 문화라는 틀 안에서 설명하는 '해석'의 산물인 것이다.


이러한 통찰은 종교적 전통의 두 가지 갈래인 주지주의(主知主義)와 주의주의(主意主義)의 대립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주지주의가 신을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파악하려 했다면, 주의주의는 인간의 모든 지적 오만을 내려놓고 신의 압도적인 의지 앞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종교개혁 전통에서 강조된 '지옥', '종말', '심판' 같은 '두려운 신비'는 바로 이 주의주의적 관점에서 힘을 얻었다. 신을 이해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간의 교만이며, 진정한 구원은 신의 비합리적인 힘에 대한 전적인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두 관점을 넘어서는 새로운 통찰: 제약된 구성주의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관점 중 어느 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답은 '둘 다 맞지만, 둘 다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가장 통찰력 있는 접근은 이 둘을 하나로 합치는 ‘제약 구성주의(constrained constructivism)라는 새로운 시각이다. 이는 우리가 종교적 경험을 ‘몸과 환경, 그리고 문화적 배경*이 함께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의 제약: 우리의 몸은 특정 감각에 보편적으로 반응한다. 예를 들어, 거대한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나 타오르는 불꽃, 높은 산에 올랐을 때의 느낌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보편적인 감각은 언어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종교적 경험의 토대가 된다. 이는 종교 간의 대화가 불가능하지 않다는 '약한 보편성(공통된 감응성)'의 근거가 된다.

마음의 해석: 우리의 뇌는 이러한 감각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성장 과정에서 배운 문화적 배경, 즉 '선입견(priors)'을 통해 그 감각을 해석한다. 똑같은 경외감을 한 사람은 '신의 은총'이라고 해석하고, 다른 사람은 '우주의 카르마'라고 해석하는 식이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 의미가 종교의 내용과 깊이를 만든다.

결국, 종교적 경험은 ‘같은 물(보편적 감응성)’이 ‘다른 배관(문화적 해석)’을 거치면서 ‘각기 다른 압력(개인적 정동)’으로 흘러나오는 것과 같다. 이 과정에서 '물'의 본질은 보존되면서도, 배관의 복잡성에 따라 완전히 다른 흐름과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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