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925 샤머니즘과 생활종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Taking People Seriously(사람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인류학자와 토착민이 같은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지시하는 세계는 서로 다르다. 따라서 번역 과정에서 오해는 불가피하다. 기존 인류학은 이런 오해를 제거하고 ‘정확한 번역’을 목표로 삼았지만, 비베이루스는 오해가 본질적이므로 이를 통제된 방식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해를 단순히 ‘미개한 사고’나 ‘잘못된 세계관’으로 치부하지 않고, 그 자체를 존중할 때 인류학은 비로소 타자의 존재론을 진지하게 다룰 수 있다. 이는 서구 지식이 가진 지배성을 흔드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따라서 연구자는 자신의 범주를 강요하지 않고, 타자의 개념들이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드러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해를 숨기지 않고 기록하며 반성적으로 분석하는 일이다. 기존 번역이 ‘같은 대상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면, 그의 번역은 애초에 ‘같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가리키는 표현들 사이의 어긋남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결국 인류학자는 자신의 개념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세계에 맞추어 스스로 변형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문화주의식 번역은 “세상은 하나인데, 각 문화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만 다르다”라고 본다. 하지만 관점주의적 번역은 “애초에 세상 자체가 서로 다르다”라고 본다. 그래서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사실은 전혀 다른 것을 가리키는 셈이다. 이 방식은 서구가 가진 “하나의 보편적 세계”라는 생각을 절대시하지 않고, 다른 세계가 가진 고유한 존재 방식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기존 인류학은 연구 대상을 ‘표상(외연)’으로 고정하려 했다. 하지만 비베이루스는 개념들 사이의 내재적 관계(내포)에 주목한다. 이는 단순한 해석을 넘어, 존재론적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인식론이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를 묻는다면, 존재론은 “무엇이 존재하는가”를 묻는다. 그는 인류학이 더 이상 타인의 ‘문화적 해석’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 자체의 다층적 존재 방식을 탐구해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재규어가 맥주를 마신다”고 말할 때, 인류학자는 이를 단순한 은유나 상징으로 번역하는 대신, 그들의 세계에서는 실제로 재규어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보고 있다는 존재론적 진술로 받아들여야 한다.
서구 인류학자는 '선물'을 주고받는 거래의 객체로 이해하지만, 마오리들은 선물 속에서 영적 관계를 본다. 이 차이는 단순한 인식의 차이가 아니라, “선물이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정의의 차이를 드러낸다. 이런 관점은 현장에서 중요한 방법론적 함의를 갖는다. 예를 들어, 샤먼의 의례를 단순히 상징적 행위로 번역하지 않고, 그 세계에서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탐구하는 방식이다.
왜 이것이 정치적 문제인가? 원주민의 개념을 은유나 오류로 치부하는 순간, 그들의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된다. 이는 곧 원주민의 존재론을 존중하지 않는 정치적 행위가 된다. 흔히 “원주민은 선물에 영이 있다고 믿는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것은 원주민이 틀린 게 아니라 인류학자가 그 세계를 설명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belief라는 용어는 우리가 끝내 전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관점을 지칭한다. 따라서 원주민의 세계를 실제(real)로 인정하지 않고, 일종의 오류나 환상으로 치부하는 효과가 있다. 믿음이 아니라, 우리가 개념을 조정해 그들의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기술해야 한다. 문제는 원주민의 믿음이 아니라, 인류학자의 기술 실패다.
사유의 영구적 탈식민화(permanent decolonization of thinking)란 원주민 개념들을 서구적 틀에 끼워 맞추지 않고, 오히려 인류학 자체의 개념틀을 변형시켜 타자의 사유를 기술하려는 태도를 뜻한다. 이는 지식 생산의 수준에서 식민적 전제를 걷어내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비베이루스의 입장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원주민, 세계 등의 개념을 미리 규정하지 말자고 주장하면서도, 정치적 입장은 ‘원주민 지지, 국가 비판’ 등으로 고정해 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비판자들은 이를 일관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인류학의 고유한 정치적 힘은 사실 세상을 직접 바꾸는 데 있지 않다. 대신 개념의 층위에서 발휘된다. 인류학은 세상을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며, 이 점에서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스트라선이 페미니즘을 단순히 여성 억압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성찰과 불완결성을 인류학적으로 실천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처럼, 비베이루스도 정치적 개념을 그런 개념적 실험의 장에 포함시켰다면 더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관계 개념은 존재론적 전환의 핵심 범주였지만, 너무 당연하게 사용되면서 마치 절대적인 분석 단위처럼 굳어졌다. ‘포스트-리레이셔널(post-relational)’ 시도는 이러한 전제를 흔들어 관계 자체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려는 것이다. 관계를 분석의 종착점으로 두는 대신, 관계를 다시 관계화(relation of relations)하거나 그 자체의 한계를 드러내는 흐름이다. 와그너, 스트라선, 비베이루스가 주로 사유와 개념의 차원에 집중했다면, 젊은 세대 연구자들은 사물성과 물질성에 주목하면서 존재론적 전환을 보다 구체적이고 실험적인 장으로 확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