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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결 Feb 02. 2021

이제야

한나야, 지난주에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어. 너를 재우러 들어간 밤이었는데 대단한 감정이 엄마에게 왔어. 

요즈음 엄마는 몇달 째 너를 업고 일을 한단다. 우선은 이른 아침에 네가 쓴 유리젖병(어제부터 젖꼭지 대신 빨대로 바꿨어. 우유를 중탕해서 데우기 때문에 아직도 젖병을 쓰고 있단다.)과 쪽쪽이, 빨대컵, 실리콘 칫솔 등을 씻어서 소독하는 동안 엄마는 너를 업고 있어. 그러면 너는 등에서 솔솔 잠이 든다. 물소리, 솔 소리가 백색소음 같고 좋은가봐. 그런데 아빠가 씻으면 금세 깨더라. 그래서 엄마가 업고 재우는 김에 씻는단다.

그리고 네가 먹을 밥을 지을 때도 너를 업지. 평일에는 네가 어린이집에 가기 때문에 하원하고 온 너를 업고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 하루의 2막을 준비하는 데일리루틴이 되었어.


아마도 그 '대단한 감정'이 찾아온 날은 토요일이거나 일요일이었을 거야. 토요일에는 아빠가 출근을 하기 때문에 엄마는 혼자 너를 보는데, 참 이상도 하지. 혼자서 아직 아기였던 조카 둘도 봤었는데 너를 오롯이 혼자 보는 토요일은 사실 일주일 중 가장 힘든 날이거든. 토요일 첫끼는 저녁 일곱시가 넘어서 먹었고 그동안 너는 황금똥을 네 번 보고 밥도 잘 먹었고 잠도 잘 잤단다. 물론 떼와 투정은 많이 부렸지. 너를 씻기고 먹이고 다시 이를 닦이고 재우러 들어갔는데, 정작 나는 너무 지저분하다는 걸 깨달은 거야.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먹지도 못했어. 처리해야 하는 일은 네가 집에 오면 '올스톱'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에 금요일 오후에 손을 놓은 일은 다음주 월요일이 되기 전까지는 다시 손을 댈 수가 없고 그렇게 오로지 나를 위해 하는 일들은 뒷전으로 밀어둔 채, 너를 재우러 갔는데 너는 그날따라 잠투정을 더 하면서 안겨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더라. 그래서 약간 벌서는 것처럼 너를 안고 둥개둥개 재웠어. 삼십분인가 한시간인가 너를 안고 재우는데, 그때 엄마에게 찾아온 감정은 감사였단다.


내뜻대로 할 수 없고, 번번이 좌절되고, 속수무책이고, 지연되고, 나중을 기약해야 하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 너를 낳고 부터는 그런 것에 익숙해졌다. 자아실현이라는 말을 하는데, 도무지 자아를 실현할 수가 없게 된 거지. 그래서 한동안은 네가 내 가능성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에 초조한 적도 많았어. 그런데 엄마는 이제 알게 되었다. 너로 인해 내 가능성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엄마의 하루가 너로 인해서 가치 있는 일로 채워진다는 것을 말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성취를 통한 기쁨만을 알았을 거야. 좌절을 통한 기쁨이 있다면 그건 말장난이라고 여겼을 거야. 하지만 이제는 안단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자신의 몸을 태워서 주변을 밝히는 촛불은 우화의 소재로 사랑받았어. 하지만 강요당하는 희생은 절대로 아름답지 않을 거야. 왜 엄마의 역할을 희생이라 부르고, 또 모성을 숭고하다고 하는지, 이제야 알겠다. 내가 숭고해서가 아니라, 그 역학이 숭고함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겠다. 쌔근쌔근 엄마를 꼭 안고 잠드는 너를 보면, 내가 너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우리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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