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욕망의 전염과 복제로 얽힌 너는 바로 나의 거울
인간의 존엄성과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는 서로의 공존을 생각하게 하는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는 피에타의 다른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뫼비우스'의 시작은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10 길, 청와대와 도보로 10여분 남짓 걸리는 장소이다. 서울은 한국의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중심지이다. '뫼비우스'는 서울, 서울에서도 정치적 권력의 일인자가 살고 있는 청와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에서 이 영화를 찍음으로 인해 등장인물들은 자본주의의 한국인을 대표하며, 더욱 나아가 인류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주인공을 통한 인류의 단면을 통해, 자본주의의 한국과 세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그 단면을 통해 한국인과 인류가 서로의 공존을 모색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수평적 존재에서 수직적 권력관계로 바꾸어 놓는다. 부자와 가난한 자, 부자인 남자와 가난한 남자, 부자인 남자와 가난한 여자, 부자인 여자와 가난한 남자, 부자인 여자와 가난한 여자가 자본주의 사회의 수직적 권력관계의 한 예이다. 다른 한 수직적 권력관계의 예는 무차별적 인간 성적 기능을 중심으로 본 인간의 상품화, 유교문화를 배경으로 한 나이의 적고 많음에서 오는 인간 차별이다. 즉, 남자의 성적 욕망의 행위를 신체적 결점 없이 해 낼 수 있는가. 여자의 경우, 자본가의 중년 남성 주인공으로 보이는 갑의 위치에서 상대적으로 젊고 가난한 위치는 상하관계를 극적으로 나타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뫼비우스'에서 보여주는 사회의 단면에서는. 하지만, 인간의 상품성, 즉, 수직적 권력관계를 통한 성상품화를 적나라하게 폭로된다.
울타리가 쳐있어 안전할 것 같은 집의 내부는 욕망의 산실이다. 욕망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고, 욕망이 전염되고 복재되어가는 장소이기도 하고, 욕망의 뿌리가 제거되는 곳이기도 하다. 남편과 아내는 욕망의 근원지이고, 남편이 외도를 자행하고, 아내는 남편의 성기를 자르려는 폭행을 시도하고, 아내는 소년의 성기를 제거하고, 소년이 남편의 성기를 이식받자 아내는 소년과 관계를 맺는, 즉 두 개의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무는 구조가 결국 자신의 꼬리를 무는 구조임을 보여준다.
울타리가 없는 '안전 지킴이집'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가히 눈여겨 볼만 하다. '안전 지킴이집' 내부에서는 소녀가 소년을 유혹하고, 동네 남성들에게 소녀는 폭행과 강간을 당하고, 동네 남성중 한 사람은 소녀를 강간 폭행으로 감옥에서 출소 후, '안전 지킴이집' 안에서 소녀와 소년의 합작으로 성기를 거세당하는 장소이며 성기를 거세당한 자들과 소녀와의 관계 맺기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안전 지킴이집' 밖에서, 소년은 소녀의 눈 앞에서 동료 학생들에게 성폭력을 두 번째 당하는 장소이다.
욕망의 가로/세로 전염/복제와 권력관계
'뫼비우스' 속 자본주의의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부부의 욕망의 결정체는 소년으로 상징되고, 소년은 부부의 욕망의 전염과 복제를 가로와 세로의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뫼비우스' 속 소년은 소녀와 관계를 맺으며 욕망을 가로 복제를 하고, 엄마와 관계를 맺으면서 욕망을 세로 복제를 한다. 부부는 평등한 가로 관계이나, 남편이 외도를 함으로 인해, 세로 관계로 바뀌고, 남편이 자신의 성기를 소년에게 이식시켜 주고 아내가 소년과 관계 맺음으로 인해 부부의 권력관계는 세로 관계로 바뀐다. 소년은 아버지가 소녀와의 외도를 목격한 후, 그 날 저녁에 자위를 하며 아버지의 욕망에 전염되고 이 전염된 욕망을 자위행위를 통해 복제한다.
먼저, '뫼비우스' 영화 속 욕망은 세로 방향 전염과 복제의 구조를 영화 속에 이미지로 잠시 등장하는 소설, '위대한 게츠비(The great Gatsby)'와 '진주 귀고리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와 함께 이 영화는 똬리를 틀고 있는 형식이다.
'위대한 게츠비'에서 게츠비를 마주 보는 '뫼비우스'의 영화 속 인물은 '엄마'이고, '진주 귀고리 소녀'의 소녀를 마주 보는 '뫼비우스' 속 인물은 '소년'이다. 교묘하게도 - 의도를 유무를 알 수 없지만 - 김기덕 감독은 남(게츠비와 뫼비우스 속 소년)과 여(뫼비우스 속 엄마와 진주 귀고리 소녀)의 인물을 병렬식으로 마주 보게 하였다. '위대한 게츠비' 소설 속 게츠비라는 인물과 '뫼비우스'의 영화 속 엄마는 질투, 구애, 그리고 사랑을 갈구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위의 그래프는 미국 경제학자 앨런 크루거( Krueger, Alan B(ennett)가 2012년에 미국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으로서 소개한 '위대한 게츠비의 곡선(The Great Gatsby Curve)'이다. 가로축은 불균등 (Inequlaity)을 나타내고 세로축은 세대 간 부동성 (integeerational immobility)을 나타낸다. 즉, 사회적 불균등이 높은 사회 일 수 록 세대 간 부동성이 높아지며 (페루, 브라질, 칠레),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의 국가는 상대적으로 낮은 사회적 불균등이 낮은 세대 간 부동성과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소설 '위대한 게츠비' 속 인물 게츠비는 가난한 부모 아래 성장했으나 그는 경제적으로 아메리칸드림을 이룩한 인물이다. 그를 한 사회로 생각하면, 불균등이 낮고 세대 간 부동성도 낮은 시스템을 상징할 수 있다. 게츠비의 아메리칸드림은 그가 육군 중위 시절 처음 만난 데이지 (Daisy)라는 여인은 상류사회의 상징이며, 그녀의 변심이 게츠비의 가난이라 생각하여 게츠비가 금전적 성공을 할 수 있는 강력한 욕망의 동기가 되는 인물이다. 다른 인물과 결혼 한 데이지가 부자가 된 게츠비 자신에게 돌아와 결혼하리라 게츠비는 믿는다. 하지만, 게츠비는 결국 자신의 저택 수영장에서 오해로 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게츠비 생전에 연 성대하고 화려한 파티를 즐겼던 사람들과 데이지는 게츠비의 장례식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쓸쓸한 마지막을 맞이하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게츠비가 소설 속에서 '욕망의 동기'인 데이지로부터 성공할 수 있는 행동의 힘을 얻었다면, '뫼비우스' 속 아내는 '욕망의 동기'인 남편의 내연녀인 소녀로부터 행동의 힘을 얻는다. 소설 속 게츠비와 영화 속 아내의 결말이 총격에 의한 사망으로 결말을 맺는 점도 공통점이고, 소설 속 게츠비가 말하는 '녹색'과 '뫼비우스' 속 아내가 입고 나오는 '녹색 의상'도 욕망의 상징을 보여준다.
소설 '위대한 게츠비' 속에 나오는 '녹색'은 게츠비의 데이지를 향한 질투심과 욕망을 상징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부와 돈을 상징하며, 이것들(질투, 욕망, 부와 돈)은 결국 죽음(게츠비의 녹색 차)을 상징하는 상징체계이다. 영화 '뫼비우스'의 아내가 녹색 의상을 입고 나오는 것 역시 소녀를 향한 질투심과 욕망, 자본주의 상회의 부, 돈, 그리고 그것들은 올가미가 되어 남편에 의한 아내의 죽음에 이르게 한다.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시스템 안에서 인간의 추상적인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 결여로 모든 것은 자본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 되고 이러한 시스템은 인간관계 안에 권력을 만들며 결국 공멸을 가져온다.
'위대한 게츠비' 소설 속 '진주'는 소설 속 화자 닉 캐러웨이 (Nick Carraway)의 칠촌 여동생인 데이지 (Daisy Buchanan), 즉 톰 뷰캐넌 (Tom Buchanan)이 데이지의 사랑을 사는데 이용되는 자본주의적 상징이다. 톰은 데이지의 사랑을 사기 위해 결혼식 전 약 $350.000의 가치 즉, 한화로 약 4억 정도의 가치의 진주 목걸이를 선물한다 (He came down with a hundred people in four private cars, and hired a whole floor of the Seelbach Hotel, and the day before the wedding he gave her a string of pearls valued at three hundred and fifty thousand dollars.). 데이지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녀의 사랑과 그녀는 톰 뷰캐넌에 의해 값이 매겨졌고 살 수 있는 것이 되어버렸다. 데이지와 톰 사이의 권력은 톰이 데이지의 사랑과 육체를 결혼 제도 안에 속박 시킴으로 인해 톰의 권력을 보여준다.
'뫼비우스'의 소녀 역시, 그녀의 사랑과 그녀의 육체는 소년의 아빠에 의해 값이 상정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소녀의 집은 소년의 아빠의 집과 닮았다. 그녀는 소녀 아빠와의 관계를 통해 잠시나마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화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 하녀의 모습과 비슷하고 하녀의 신분으로 화가 부인의 진주 귀고리를 착용하고 한 편의 작품으로 남는 기회를 갖는다. '뫼비우스' 속 소녀는 홀로 '소주'를 마신다. 그녀가 소년의 아빠를 만날 때면 그녀는 '와인'을 마실 수 있다. 마치, 소년의 엄마가 와인을 마시고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하녀가 화가의 진주 귀걸이를 착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처럼. '뫼비우스'의 소녀는 소년의 아빠가 자신을 데려오는 것을 기다리며, 그녀가 그와의 관계에 있어서 결정권은 없다. 소녀는 소년 아빠에게 전화를 걸기도 하고, 차를 막아 서 보기도 하지만, 소년 아빠와 다시 만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권력관계는 결정권이 없는 소녀와 결정권을 통제하는 소년 아빠의 권력관계를 보여준다.
'진주 귀고리 소녀'속 소녀는 자신이 화가로부터 받은 진주 귀고리를 팔아 자신의 남편에게 화가의 가정이 빚진 고깃값을 청산함으로써 그녀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확보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본주의 속에서 하녀(maid)로 규정되어 짐으로 인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종속되어진 존재로 남겨진다. 비록 그녀는 그녀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자신의 남편과의 관계에서 회복하나, 시스템 안에서는 여전히 하녀로 남게 되는 것이다.
'성폭력'의 법적 의미는 "강간뿐만 아니라, 추행, 성적 희롱, 성기 노출, 어린이 성추행, 윤간, 아내 강간, 강도 강간 등 상대방이 거절하는데도 불구하고 가해지는 모든 신체적·언어적·정신적 폭력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이라 한다 (출처:http://cukgcc.byus.net/infor/infor_04.htm). 영화 '뫼비우스' 속 (성) 폭력은 소년의 아빠가 엄마 눈 앞에서 벌어지는 '외도', 소년의 엄마가 '아빠'의 성기 제거 시도, 소년의 성기 제거, 소년과의 관계 맺기 (소년 아빠의 입장에서는 엄마와 소년의 아빠를 향한 (성) 폭력이다), 소년의 엄마와 아빠의 자살 (소년의 입장에서 또 다른 폭력 혹은 성폭력)은 서로가 서로에게 행하는 것이다. 인간은 서로 얽힌 존재로서 공존하기 때문에, 이런 (성) 폭력은 서로의 공멸을 유도한다. 이러한 (성) 폭력의 연결은 이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문제임을 시사한다 (비록 스크린에 비친 영어가 콩글리쉬지만 대충 내용은 아래와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외부적 (성) 폭력이 '뫼비우스' 영화는 '피에타' 보다 더욱 잔인하다. 영화 공간을 평범한 가정집과 마을로 세팅함으로써 자본주의 속의 (성) 폭력과 권력관계가 더욱 극대화된다. 평등한 존재인 같은 또래 집단에서 조차 (성) 폭력은 행해진다. 화장실에서 소변보던 소년의 발에 소변이 흘러내리자, 또래 집단의 한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소년이 화장실에서 나오 길 기다린 후 소년의 잘린 성기를 폭력을 통해 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적 기능이 결여된 인간은 놀림과 폭력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폭력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안전 지킴이 집' 앞에서도 버젓이 자행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년의 또래 집단의 성폭력은 동내 건달들에 의해 중단되어진다. 자본주의 권력 사회에서 권력은 상대적이다. 소년의 또래 집단의 권력은 동내 건달의 권력보다 약하다. 권력의 상대성은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공멸의 관계의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권력이란 시스템 안에서 돈 있는 자는 권력을 행사하고 권력은 강자를 나타내고, 돈을 사용하는 자는 돈 없는 자를 약자, 성상품화/ 무시의 대상, 그리고 성노리개로 다룬다. 소년을 또래 집단의 (성) 폭력에서 구해준 동내 건달들은 상대적 약자, 소녀의 가게에서 술과 먹거리를 구입하고, 자연스럽게 소녀를 (성) 폭행한다. 한 패거리가 된 소년도 피해자에서 소녀에게 (성) 폭행을 가하는 가해자가 된다.
소녀의 (성) 폭력으로 잡혀 온 동내 건달들과 소년은 '경찰서' 안에서 아빠와 경찰 공무원에 의해 또다시 두 번 (성) 폭행을 당한다. 소년의 아빠는 소년의 성기 부재에 의한 (성) 폭력의 무고함을 밝히기 위해 동내 건달들이 있는 곳 앞에서 소년의 허락 없이 소년의 바지를 벗기려 하자 소년은 몸부림치고 자신의 아빠를 구타한다. 그 후에 경찰 공무원 두 명은 소년을 붙잡고 동내 건달들이 구경하는 와중에 소년의 바지를 벗겨 소년의 성기 부재를 확인한다. 소년의 아빠도, 경찰도 소년을 지켜 줄 수 없고, 경찰서 안도 소년에게는 안전하지 못 하다.
소년은 아빠와 경찰에게 폭력을 가한 죄로 소년원에 수감된다. 소년원 안 역시 권력관계 (먼저 수감된 자 vs. 나중에 수감된 자)는 여실이 드러난다. 먼저 수감된 자들은 소년을 '성노리개'로 희롱하여 저항해 보았지만, 저항을 폭력으로 본 수감 지도자 덕에 소년은 '독방'에 갇힌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상황이다.
성적(性的) 대상에게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줌으로써 성적 만족을 얻는 이상(異常) 성욕인 사디즘과 이성(異性)으로부터 정신적/육체적 학대를 받는 데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변태 성욕인 마조히즘을 통한 자학(自虐)과 타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위안하고 타인을 힐링한다. 즉, 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른, 사이비적 위안과 힐링에 몰입한다. 언제 인지부터 한국 토크쇼나 오락프로그램에서 자신과 타인을 놀리고 비방하며 그것으로부터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정착되고 시청자나 방송자 모두 이런 현상들이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고 계속 방영이 되는데 이러한 것도 자학과 타학의 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김기덕 감독은 이러한 현상들을 더욱 적나라하게 자신의 영화에 담아낸다. 마치, 트레이시 슈발리에 (Tracy Chevalier)의 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 속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가 실사(實寫)를 보는 듯한 정교한 원근감의 표현을 위해 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란 뜻인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는 광학 기구를 사용한 이치와 같다. 베르메르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하여 자연의 법칙을 이용하여 현실의 설득력 있는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 예술가의 목적이라 생각했듯이 (https://www.nga.gov/exhibitions/verm_4.shtm),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 영화에서 빛의 사용과 영화 스토리의 구조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비추는 실상을 두 번 뒤집어 보아야 알 수 있다. 아래 두 장면은 소년의 아빠와 소녀가 돌을 이용하여 신체 한 부분에 찰과상을 스스로 입힘으로서 성적 만족을 얻는 장면이다.
'뫼비우스'의 아래 장면은 자학과 타학을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통해 보여준다. 돌을 이용하는 찰과상 대신 칼을 사용한 성적 만족을 각자, 그리고 서로에게 자학과 타학을 통해서 이루어 낸다. 소년이 아버지의 성기를 이식받은 후에도 소년의 성적 기능은 정상적으로 회복되지 못하고 소년의 엄마를 통해서만 성적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진주 귀고리 소녀' 소설 속 '소녀'와 영화 '뫼비우스' 속의 '소년'은 자본주의 사회 속의 인간의 욕망이 관성(慣性)에서 자성(自醒)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소녀가 소설 처음에 그들이 오는 것을 기다렸지만 (My mother did not tell me they were coming, p. 3) 소설 마지막에서 자신이 하녀의 신분으로 베르메르의 그림의 소재가 되기 위해 베르메르(Vermeer)의 아내의 진주 귀고리를 착용한 것 때문에 하녀직에서 쫓겨 나 정육점 아들(Pieter)과 혼인을 올린 후 세월이 지나, 베르메르의 유언대로 자신 아내의 진주 귀고리를 상속받은 후, 그 귀고리를 팔아 베르메르가에서 자신의 남편 정육점에서 빛 진 만큼만의 돈을 취하고 나머지는 숨긴다. 소설 결말은 '진주 귀고리 소녀'의 소녀 자신이 자유를 얻은 것으로 끝난다( A maid came free: 한 하녀가 비로소 자유를 얻은 것이다). '뫼비우스'에서 소년의 성기는 처음에 엄마에 의해 잘린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소년은 자신 스스로 자신의 성기를 제거하고 욕망에서 벗어나는 인물이다. 각 각 작품에서 둘은 비슷하지만, '뫼비우스'의 소년이 한 발 더 발전된 모습의 존엄성을 보여준다.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소녀와 '뫼비우스' 속 소년은 존엄성을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인물임을 상징한다.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보면, '진주 귀고리 소녀' 속 소녀는 애매모호한 위치를 보여준다. 화가 베르메르의 스폰서인 Van Ruijven에게는 ‘a maid came free’, 그가 아무런 벌 없이 소녀를 성적으로 희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녀의 남편 피터는 화가의 집에서 외상으로 가져간 고기 값을 지불하지 않고 소녀가 그 집에서 쫓겨난 후에 다른 고깃집과 거래를 하자, '이제야 하녀의 값어치가 얼마인지 알았다' ("Now I know what a maid is worth” (p.220))라고 농담을 하여 그녀의 값이 15 길더라고 상정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동등한 권력관계에 있을 법한 부부관계에서도 성상품 화가 버젓이 일어난다. 소설 마지막에 소녀는 그녀의 가치를 Van Ruijven이 그녀에게 한 말을 반사하여 말하지만 그것의 성질은 다르다 한다. ( 피터는 나머지 돈을 보면 기뻐하겠지, 빚이 이제 청산되었으니. 나도 피터에게 아무 비용도 들지 않았을 것이리라. 하녀는 자유롭게 온 것이다 ‘Pieter would be pleased with the rest of the coins, the debt now settled. I would not have cost him anything. A maid came free’ (p. 233)). Van Ruijven이 말한 의미는 공짜라는 의미로 소녀를 범하는 짓은 도덕적 양심적 죄악에서 조차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소녀가 말한 의미는 결국 자유가 되었다, 즉 존재론적인 성격을 지님으로 인해 자본주의적인 것과 육체가 자유롭게 되었다는 중의적 의미를 갖는다. (출처: http://file.ebook777.com/004/EncObjVisArtInConFic.pdf)
'뫼비우스' 속 소년은 마치 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가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는 광학 기구를 사용하여 자연의 법칙을 이용하여 현실의 설득력을 얻을 이미지를 창조하듯이, 자신만의 광학 기구 (손전등)을 사용하여 욕망의 내면의 자연적 법칙을 깨닫고 결국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영화 초반부에서 부처의 머리상은 유리 뒤편과 단상 위에 있다. 영화 후반부의 부처의 머리상과 소년의 거리는 좁혀져 있고 부처와 소년의 사이의 유리는 부재하고, 부처상은 바닥에 놓여 있다. 초반부의 부처와 후반부의 부처는 초반부의 부처는 빛을 반사하여 모습을 나타낼 뿐이지만, 깨달은 후 맞은 소년의 부처는 빛을 반사하여 모습을 나타내고 그 모습이 또 한번 그림자로 반사되며 그 그림자 주위를 더욱 밝게 한다. '뫼비우스'속 가족을 중심으로 이해하다 보면 꺼림칙하게 남는 퍼즐 두 조각이 있다. 바로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소년 스님의 불상에 불빛을 비추고 불상 앞에서 절하는 모습과 소년 어머니가 소년 스님의 뒤를 따라가는 장면이다. 소년의 가족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대신, 두 장면으로 나뉘어 나오는 소년 스님의 깨달음의 과정을 등장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뫼비우스'는 무명(어둠)에서 욕망의 뿌리를 깨닫는(빛과 그림자) 구운몽 같은 꿈 이야기가 아닐까. 빛, 즉 깨달음은 그림자가 있을 때 더욱 빛나 그것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빛의 실상은 어둠이 없이 그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가 주장하던 바와 비슷하게 '뫼비우스'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사회적 권력을 갖고 있는 자들인 우리 자신에게 '위대한 게츠비'의 소설 속 화자 닉 캐러웨이 (Nick Carraway)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어질 때면, "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혜택을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라."고.......
"Whenever you feel like criticizing any one, " he told me,
"just remember that all the people in this world haven't had the advantages that you've had"
욕망은 뱀이 서로 다른 이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은 결국 자기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개인적/사회적 시스템이기에 욕망으로 얽힌 너와 나는 덫에 빠진 것과 같다. 이 덫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욕망은 환경과 주위의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으로 인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사그라드는 것임을 깨닫고, 끊임없이 욕망으로 떠밀려 가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반복하고, 이 과정에서 인류의 존엄성과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는 서로의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사회 그리고 인류의 스템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인류)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끝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
김기덕 감독의 '뫼비우스'는 피에타의 다른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뫼비우스' 영화 속에서 나오는 '위대한 게츠비'와 '진주 귀고리 소녀' 소설 속 문구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김기덕 감독 영화 리뷰 모음집>
"그러한 민감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그런 진부한 감수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한테서도 일찍이 발견한 적이 없고 또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위대한 게츠비 중).
"그의 눈은 황금으로 가득 찬 방만큼이나 가치가 있지. 그러나 가끔은 그도 자기가 그랬으면 하는 세계만 보곤 해. 실제로 세상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야. 자기의 그런 시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초래할 결과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 그는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 작품만을 생각한단다." ('진주 귀고리 소녀 중, p. 235)
김기덕 감독 <뫼비우스> 다시 보기
보너스
2012년 수요기획에 나온 김기덕 감독 차는 뫼비우스에서 주인공이 타고 다니는 차로 영화에 등장한 바 있다.
왼편은 영화 뫼비우스의 한 장면, 오른편은 수요기획에서 김기덕 감독이 직접 운전했던 차